신헌철(申憲澈ㆍ59) SK(주) 사장은 유난히 눈물 많은 경영자다.


신중한 표정과 조심스러운 몸가짐에는 오랜 신산(辛酸)을 견뎌낸 수양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1955년 울릉도를 오가며 해산물 수송일을 하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신 사장이 부산 해운대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는 남동생 우철씨(부산지방법원 판사), 여동생 홍란씨와 함께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던 홀어머니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초콜릿과 사탕은 미군이 운영하는 동네 교회에서 얻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한 학생들이 흔히 그랬듯이 신 사장도 은행원의 꿈을 안고 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상고 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당시 부산 출신 기업가 김지태씨가 운영하던 '백양장학회'의 장학생이 됐다.


이때 같이 장학금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 학년 아래의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두 학년 아래의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편안한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63년 겨울 지금도 절친한 친구인 부산상고 동기 이성태 한국은행 부총재와 함께 서울대 상대에 도전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수석 입학한 이 부총재는 "헌철아, 너무 실망말거라. 내년에 시험 다시 쳐서 서울에서 만나자"고 위로했지만 64년의 재도전에서도 그는 실패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자신보다 못한 학교 성적으로도 너끈히 합격한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시 65년 겨울이 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터였지만 그는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감은 불길했고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안전하게' 연세대나 고려대를 지원할 수도 있었으나 사립대는 등록금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귀착지는 부산대 상대였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결론내렸어요. '어떤 대학이든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2년을 허송세월했다는 자책감이 찾아왔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해병대(179기)에 자원 입대하게 됐다.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간단했다.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2개월 정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스케줄은 제대를 4개월 앞둔 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또다시 구겨졌다.


전 사병의 제대가 무기한 연기된 것.


뒤 이어 8월에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서울 진격 사건, 10월에 울진 무장간첩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결국 복무예정기간 26개월보다 7개월 많은 33개월이 지나서야 군복을 벗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요."


신 사장은 잇단 대입 낙방과 해병대 생활을 '내 인생 최대의 비료'라고 말한다.


고통을 참고 어려운 세월을 인내하는 지혜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성취와 보람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7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했다.


처음 맡은 업무는 판매기획과의 마케팅.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규 주유소 부지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월급은 4만6천5백원으로 삼성물산(4만2천5백원)보다 많았지만 무척 고생스러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73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해인사 주유소 개발권을 따낸 것.


사찰 소유의 주변 땅은 꽤나 넓었지만 주유소가 설치될 장소는 한 곳에 불과했다.


정유 4사 직원들이 스님들을 찾아 큰 절을 올리며 접전을 벌였지만 승리는 유공에 돌아갔다.


신 사장은 73년 6월 사내 소식지 '유공 스탠드'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우릉대고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다지만 하나의 폴 사인을 얻어내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의 노력들이 개업식날 휘날리는 깃발 하나하나에 전설처럼 나부끼고 있다."


주유소 자리를 찾아 험한 산자락도 마다하지 않다 보니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넘겼다.


74년엔 마산의 한 야산에서 운전 중이던 차가 굴렀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아팠고 차는 박살이 났다.


마침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리나케 달려온 동료가 권하는 커피 한 잔을 받아든 그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왠지 서러웠습니다. 걱정해주던 상사와 동료들이 고맙기도 했고…."


80년대 초 호남정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입사 10년 만에 부장이 된 그는 대전지사장을 맡아 15개의 주유소와 충전소를 매입했다.


대전이 장차 물류중심이 될 것으로 보고 시세보다 조금 비싼 가격에 과감하게 베팅을 했다.


그때 3억원을 주고 사들인 일부 주유소들의 요즘 가치는 1백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경영자로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95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수도권마케팅본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SK그룹이 기름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 사장을 신흥 경쟁시장인 통신시장에 투입한 것.


매일 새벽 2시에 퇴근해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96년 55만명이던 CDMA 가입자는 98년 7백만명으로 증가했다.


대성공이었다.


주유소나 통신시장이나 남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선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그의 장년에 뜻하지 않은 복병이 찾아왔다.


98년 말 어느날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진단 결과는 퇴행성 관절염.필드에 나가면 제대로 걷지를 못해 퍼터를 지팡이 삼아 서있어야 할 정도였다.


관절염에 좋다는 온갖 약을 다 먹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물리치료였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 매일 물 속에서 자전거타기와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자전거타기는 3백65일 매일 한다는 각오로 3백65회, 55세에 맞은 고비를 극복한다는 자세로 서서 하는 스트레칭은 55회, 33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은 33회를 했다.


그러던 중 "퇴행성 관절염에는 마라톤이 최고"라는 권유를 듣게 됐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2개월 동안 7.6km의 남산순환도로를 왕복으로 달렸다.


신기하게도 무릎 통증이 사라지고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신 사장은 그해 10월 동아마라톤대회에 처녀 출전해 42.195km를 4시간39분 만에 완주하는데 성공했다.


"38km 지점을 지나자 결승점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 그곳에서 네 시간이 넘도록 가슴 졸이며 서있던 아내가 달려와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마라톤을 8차례 완주했고 4시간3분의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신 사장은 지난 5월 장애 어린이들에게 회사 각종 행사에서 모금된 성금을 전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삶의 여러 형태에서 걸러진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가난과 불행은 성공을 위한 보약이며 선생님의 회초리'라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그런 환경을 모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믿고 견디고 바라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사장은 젊은 시절의 고통과 좌절을 철저한 노력으로 극복했고 장년에 이르러 회사와 사회가 인정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


청춘의 열정이라는 것은 본래 밖으로 표출되게 마련인데 젊은날을 온통 기다림과 인내로 채우고 버텼다.


신 사장의 편지는 그래서 심금을 울린다.



조일훈ㆍ김병일 기자 jih@hanky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