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36층에 위치한 로커스의 대표이사 사무실. 설날을 며칠 앞둔 지난 23일 이 회사 김형순 대표(43)는 책상 서랍을 열어보다 창가로 다가가 겨울의 한강을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책상 서랍 속에 든 물건이 이날 따라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재산을 압류할 때 쓰는 '빨간 딱지'였다. 지난 95년의 일이다. 음성사서함 보드를 조립업체 A사에 생산을 의뢰해 수출하는 사업을 할 때다. 그런데 첫 수출에 클레임이 걸렸다. 수출품이 반납되고 생산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금 여력이 충분치 않았던 시기인데다 제품 하자에 대한 책임 소재로 A사와 갈등까지 빚었다. A사는 로커스를 상대로 가압류를 신청했고 법원의 집달관들이 들이닥쳐 회사에 1백장이 넘는 빨간 딱지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러나 김 대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문제이지,일은 제대로 풀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입사한 지 몇개월 안된 정상희 로커스 홍보과장은 그 때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김 대표가 앞뒤 상황을 정확히 설명했고 선배들이 걱정하지 말라며 서로 다독거려 전직원이 동요없이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대형사건이 터졌음에도 직원들이 의연하게 대처하자 오히려 김 대표가 놀랄 정도였다. 결국 사건은 합의로 마무리 됐다. 김 대표는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석 장의 빨간 딱지를 서랍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두 번 사무실을 옮겼지만 빨간 딱지는 김 대표의 서랍 한켠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 김 대표는 "간직하고 싶은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비즈니스의 냉혹함을 배운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로커스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전직원이 똘똘 뭉쳐 있어 웬만한 외풍에는 끄떡없다. 로커스는 이를 바탕으로 콜센터 모바일 플랫폼 등의 분야에서 앞서가는 통합커뮤니케이션 전문업체로 부상했다. 김 대표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지난 86년 뉴욕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MIT 경영대학원을 나온 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89년 로커스USA를 설립했다. 그는 1년뒤인 90년 첫째 아들의 돌잔치 때문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현재의 로커스를 세운다. 90년대 말 한국에 벤처붐이 일 것을 예견했던 것일까. 세월이 지나 김 대표는 벤처 1세대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벤처기업가로 성장했다.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