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을 앓는 신세대 주부들이 많다는 소식이다. 귀성, 귀경길에서의 시달림과 익숙지 않은 부엌일의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법하니 그럴만도 하다. 가까운 곳으로 훌쩍 떠나 바람을 쐬는 것이 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 수도권 주민이라면 강화 석모도가 제격이다. 반나절만에 한갓진 겨울바다와 섬분위기를 만끽할수 있는 여행지로 석모도 만한 곳도 없다. 석모도는 몽고 침입시의 도읍이었던 강도(江都.강화도)의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10분 남짓 짧은 뱃길은 프랑스요리의 애피타이저를 대하는 느낌. 치켜올린 손에 든 스낵과자를 낚아채는 갈매기들이 여행 첫걸음의 분위기를 돋운다. 배가 닿는 곳은 석포리(石浦里). 원래 의미는 회포(回浦)였다고 한다. 돌이 많아서가 아니라 '물길이 휘어도는 갯가', 즉 돌개(돌캐)였는데 한자를 쓰면서 훈이 '돌'인 석(石)자로 바뀌었다는 것. 석모(席毛)도도 마찬가지. 석모도에는 돗자리를 짜는 재료인 왕골이 무성한 섬이란 의미에, '덜 또는 들'로 순하게 발음되었던 털 모(毛)가 더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산꾼이며 시인이었던 장호씨는 그래서 석모도의 원음을 '돗들섬'이라고 했다. 석포선착장에서 전득이고개를 넘어가면 보문사가 나온다. 보문사는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과 함께 한국 관음신앙의 3대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5년) 회정선사란 분이 지은 사찰이라고 전한다. 보문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석실과 눈썹바위 마애관음보살상이다. 천연동굴을 이용, 3개의 홍예문으로 된 석실에는 23개소의 감실에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비롯한 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한 어부의 그물에 건져 올려진 불상들인데 현몽대로 이곳에 안치했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굵은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석실앞에 용틀임하듯 서 있다. 극락보전과 종무소 사이의 4백24개 계단을 오르면 마애관음보살상을 볼 수 있다. 1928년 이곳의 주지 등이 눈썹바위 암벽에 조상한 것으로 코가 뭉툭한 모습이 이국적이다. 마애관음기도접수처의 한 스님은 "중국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며 "관음기도처로 신도들이 많이 찾는다"고 설명한다. 자생풍수를 주장하는 최창조씨는 이곳(낙가산)을 정기(精氣)의 결정체로 여긴다. 한반도의 형상을 서쪽을 향해 서 있는 성인남성이라고 보면,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성기이고, 바로 앞의 석모도는 사출된 정액방울이라는 것. 그래서 자식을 바라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이곳은 또 기도처로서만이 아니라 낙조감상 명소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 앞으로 지나는 석모도 일주도로를 따르면 뜻밖에도 논이 널찍이 펼쳐져 있다. 하리쪽에는 영화 시월애의 촬영세트가 있었는데 태풍으로 무너져 자취를 찾을수 없다. 다시 돌아와 민머루해수욕장길로 들어서면 어류정항쪽의 철새무리가 기분을 새롭게 해준다. 여름 갯벌체험장소로 알려진 민머루해수욕장에는 서해 특유의 겨울분위기가 가득하다. 겨울이라 작업을 하지 않는 길가 삼량염전도 배놓을수 없는 볼거리. 소금을 구울때 청솔가지 타는 소리와 연기가 하늘을 덮어 매음리(煤音里)라 했을 정도로 너른 염전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석모도=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