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중 세계골프는 침체에 빠졌다.

USGA(미국골프협회)도 1942~45년에는 US오픈과 아마오픈대회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미국에선 군에 안나간 골퍼들을 위한 대회가 많이
있었다.

미국골프역사는 이 전쟁시대를 일컬어 "바이런 넬슨의 시대"라고도 한다.

당시 많은 젊은 선수들이 전쟁에 참가했다.

혈액질환으로 군입대 불합격 판정을 받은 넬슨은 51개 대회에서 26개 대회를
우승했다.

45년에는 18개 대회를 석권했다.

그 중 11개 대회를 연속우승하는 기록(평균타수 68.33)을 세운 것은 그가
당시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나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

바이런 넬슨 2세(Jr.1912~).

아이언의 명수로 "아이언 바이런"이라 불린 그는 텍사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벤 호건과 같이 글렌가든골프장에서 캐디생활을 하며 어깨너머
독학으로 골프를 배운다.

넬슨은 37년 마스터스 우승으로 시작해 US오픈 PGA챔피언십등 46년까지
수없이 많은 대회를 석권했다.

45년 그의 친구이자 가장 큰 적수였던 벤 호건, 샘 스니드가 군복부를
마치고 중간 시즌에 합류해 3인방시대가 열린다.

이 시대 넬슨은 46개 대회를, 스니드와 호건은 각각 40개 대회를 우승해
"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이었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그는 거리와 방향을 조정하는데 아무런 걱정이나 부담이
없어 한때는 자신이 몽환의 경지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다.

그의 스윙은 주위환경의 영향없이 한결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자아냈다고 한다.

아이언의 명수로 일컬어졌던 그는 하루에 36홀을 하는 경기에서는 오전에
자기가 친 디보트에 공이 또 들어감으로써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불리했다고도
한다.

43년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대회가 중단됐고 그 다음해 넬슨은 8개 대회에서
평균타수 69.67을 기록하며 우승했다.

이렇게 좋은 점수로도 만족하지 않은 넬슨은 "여러번의 칩샷을 실수했고
정신집중이 덜돼 있었다"며 맹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45년 시즌 평균점수 66.67로 단 한게임도 오버파를 넘기지 않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다.

오늘날 시니어 PGA투어에서 가장 평균타수가 적은 선수에게 "바이런 넬슨
트로피"가 주어진다.

어떤 골프대회에서도 압박감을 받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골프게임으로 가득차 있었다.

계속되는 대회의 많은 여행등이 신경성 위장병을 유발시켰고 골프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은 그는 46년 한창때인 34세의 나이로 은퇴하고
그후에는 몇개 대회에만 참가했다.

TV해설자로서도 활동한 그는 여러 훌륭한 선수들을 개인지도했는데, 그중
하나가 톰 왓슨이다.

그는 53년 PGA명예의 전당, 74년에는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 창립멤버의
영예를 안았다.

< 전 미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