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불황의 터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현재의
불황이 국내 자본재산업의 취약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모래위에는 집을 지을 수 없듯이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자본재산업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경제구조의 고도화나 지속적인 성장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자본재산업을 집중 육성해 이를 "수출산업"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육성방안을 실시중이다.

자본재산업의 수준은 곧 국가경쟁력의 바로미터란 점에서 관련산업의
선진화는 반드시 달성해야할 과제가 되고 있다.

국내 자본재산업의 현주소와 발전방향을 4회에 걸쳐 알아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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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 전문생산업체인 H정밀은 수년전 고가의 장비를 수입해 놓고도 이를
가동시키지 못했던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 회사가 생산하려던 품목은 자동차용 특수베어링.

사업초기만해도 경영진은 무사태평이었다.

기술 장비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었지만 주문량을 미리 확보해놓은 터라
장비를 수입하고 기술지도를 받으면 생산이야 걱정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가의 생산장비를 들여왔어도 공장은 제대로 안돌아갔다.

기계를 돌리는 노하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산을 하면 할수록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베어링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에서부터 교체부품 심지어는 기계가 돌릴 때
마모를 방지해주는 절삭유까지 기술제휴업체로부터 사다써야 했던 것.

경영진들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자신도 맨주먹으로 시작한 터라 "기술개발에
등한했다"고 주변업계를 비난할 처지도 못됐다.

H정밀은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고 난 지금은 중견 생산업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감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공장은 돌아가나 원천적인 기초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제 기술동향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H정밀의 경험은 국내 자본재산업의 발달과정과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선진국 기술을 모방하며 근면성 하나로 경제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랐지만
거품성장의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계공업진흥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주요산업의 설계 등
핵심기술수준은 선진국의 45-58%선에 불과한 실정.

산업은행의 조사로도 국내 수준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

이러한 자본재산업의 낙후성은 우리경제의 발전과 고도화를 발목잡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수출을 할수록 수입도 늘어나는"

국내 경제구조는 제품생산에 필요한 기계설비나 플랜트를 국내 기술로
해결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한데서 비롯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업체가 설비투자를
1% 늘릴 경우 자본재의 수입은 단기에는 0.59%, 장기적으로는 1.0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입구조는 지난해 한국의 무역적자 2백억달러중 자본재가
80억달러로 40%를 차지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최근의 불황도 결국 자본재산업의 낙후라는 우리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라는 지적도 높다.

송장준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경제불안에 대한 중장기적인
해결방법의 하나는 자본재산업의 조기육성"이라며 그 이유로 자본재산업은
<>높은 기술과 숙련된 기능이 요구돼 향후 상당기간 동안 후발공업국에 의해
추격당할 위험이 없고 <>전형적인 다품종 소량 생산산업으로서 자본재산업의
육성은 수요자인 대기업과 공급자인 중소기업간의 협력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계공업진흥회 양정환 조사연구실장은 "일본의 경우 최근 엔고의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자본재산업의 수출은 오히려 늘어났다"며 "주변 국가의 경제가
좋아질수록 자본재산업의 경기도 좋아지는게 첨단 기술력에 바탕을 둔
일본경제의 강점"이라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경제의 최대 취약부문인 자본재산업이 발달하지
않는 한 현재의 경제난 타개노력은 미봉책에 그칠 뿐"이라며 "이제 업계와
정부 모두가 힘을 합쳐 자본재산업의 육성에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본재산업의 육성엔 막대한 투자 및 고도의 기술,일관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재계나 정부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 하재영 연구원은 "자본재산업 수준은 곧 그나라 국가경쟁력의
수준"이라며 "이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과 수요의 연결, 경영진의 전문적
관리능력의 배양, 사용업체의 자본재 직접개발 장려, 민간주도의 자본재산업
모니터링 연계기관 육성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본재산업의 육성에는 자금 인력 판매 품질인증 등 적지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구조의 고도화와 기술자립을 위해 자본재산업의 육성은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게 관계자들의 한목소리다.

<이영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