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지원정책을 발표하면 뭣합니까.

돈줄을 쥔 은행벽이 높기만 한데"

정부에서 유통업 지원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중소상인들은 한결같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다.

굳이 "사농공상"을 거론치 않더라도 유통업은 지원대상에서 항상
뒷순위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감은 그만큼 폭넓고 뿌리가 깊다.

성남지역 슈퍼마켓주인들의 모임인 성남조합.

이 조합의 민병창상무는 지난해 정부가 지원해주겠다는 공동구매자금을
신청했다가 철회했던 씁쓸한 경험을 갖고 있다.

성남조합이 자금대출창구인 기업은행 성남지점에 신청한 금액은 3억원.

공동구매자금은 자본금(출자금)의 10배까지 신청할 수 있다.

성남조합의 출자금이 7억1천만원이므로 71억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겨우 3억원 정도야"라고 생각했던 민상무는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곧 깨달았다.

담보없이는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통보가 온 것이다.

"담보를 잡힐만한 부동산이 있다면 무엇하러 아쉬운 소리해가며
은행돈을 빌리겠는가"라는게 그의 푸념이다.

성남조합은 결국 올해는 신용보증기금을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용절차가 까다롭고 보증수수료까지 물어야 해, "장기 저리"란
정책자금의 매력을 잃어버린 뒤였다.

이러한 일은 성남조합만이 겪은게 아니다.

시설현대화자금이나 공동창고건립기금 등을 신청한 상인들이나 단체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은행이 중소기업의 기술수준을 담보로 대출해주는 신용대출제도.

여기서도 유통업은 지원대상에서 빠져 있다.

"유통업에 무슨 기술이 있읍니까.

특허권처럼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라는게
한국은행(금융기획과 민성기과장)의 답변이다.

정부의 지원정책은 궁극적으로 "자금지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일선 창구인 은행에서 자금대출이 막히면 아무리 화려한 지원정책이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바로 일선창구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난다는게 중소상인들의 불만이다.

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가 조합원들이 바라는 정부정책의 우선순위를
조사한 결과도 10명중 6명이 "공동화사업자금 확대"와 "자금융통을 위한
상호신용금고의 설립"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중소상인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선 자금지원만이 능사가 아니다.

한국외대 전원재교수(경영학)는 "중소상인들은 치열한 시장경쟁을
거쳐 결국 도태될 수 밖에 없다"며 "볼룬타리체인의 결성이나 전문
물류도매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대형화시키는 방안에 정책의 우선순위가
매겨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무자료시장을 근절하기 위한 세제개혁, 공동구매 공동물류
등을 통한 공동화사업의 촉진, 도매시장 재개발 등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정부는 오는 2000년까지 유통산업에 1조9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중소기업청내에 유통국도 만들어졌다.

근래 보지못했던 획기적인 지원책이란 평가다.

상인들 역시 어느때보다도 높은 자구노력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

유통시장 개방에 맞서 지역상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중소상인들.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지만 제살깎아먹기식 경쟁으로 한계상황에
몰린게 현실이다.

"선거때의 한 표"를 의식하기보다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책임지고
일하는 진짜 "공복"(공무원)이 필요한 때다.

< 이영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