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삶의 진실을 일깨우는 영화가 더 큰
울림을 준다.
"행복한 영화읽기"란 작품에서 얻어지는 감동의 밀도에 달렸기 때문.
좋은 영화의 조건도 마찬가지.
등장인물의 많고 적음이나 무대세트의 화려함보다 관객의 마음을 미리
읽어내는 감독의 "독심술"에 좌우된다.
"시고니 위버의 진실"은 단 세사람의 인물과 한적한 집 한채, 그리고
하룻밤 동안의 짧은 시간으로 구성된 영화.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가 관객을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을 발휘한다.
군사독재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수감돼 의사로부터 끔찍한 성고문을
당한뒤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한 여인의 불안과 공포가 잘 묘사된 심리
스릴러.
외딴 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고문의사 미란다(벤 킹슬리)와 마주친
여주인공 폴리나(시고니 위버)는 기막힌 우연에 전율하며 그에게
"진실의 자백"을 요구한다.
그러나 극구 부인하는 미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운명적인 만남은 인권침해조사위원장으로 내정된
그녀의 남편 제랄드(스튜어트 윌슨)를 통해 극단적인 대결과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를 더한다.
변호사이기도 한 남편은 늘 불안에 쫓기는 그녀가 신경과민으로
생사람을 잡는다며 의사편을 들다가 너무나 생생한 그녀의 옛상처를
듣고는 혼란에 빠진다.
로만 폴란스키감독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고통스런 혼란.
남편의 심리변화에 따라 절묘하게 조절되는 긴장과 반전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못잡게 하면서 영화가 끝날때까지
잠시도 한눈팔 틈을 주지 않는다.
결국은 폴리나의 진실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치밀하게 짜여진
감독과의 심리대결을 통해 "계산된 싸움"에 말려드는 것이 유일한 관객의
몫이다.
아리엘 도프만의 유명한 희곡 "죽음과 소녀"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
감독 배우 모두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 10일 중앙/씨네하우스 개봉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