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자가 받는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는 뒤따르는 자들의 분루속에서
더욱 화려해 진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노력과 따라 잡으려는 안간힘이 어울려야 경쟁의
의미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는 점에서다.
"꼴찌에게 갈채를"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게다.
신흥증권 이학래사장과 건설증권 김상수부사장. "꼴찌 예찬론"은
이들에게 매우 적절한 수사어일지 모르겠다.
지면 도태되기 십상인 정글의 법칙이 시퍼렇게 존재하는 곳이 증권계.
"대인국의 걸리버"를 생존시켰다는 측면에서 빛이 난다.
우선 김사장이 경영하는 신흥증권의 체격 명세서. "납입자본금
4백50억원,본사 영업부를 포함한 지점수 10개,직원수 3백22명,국내
32개 증권사중 31위" 김부사장이 맡고 있는 건설증권의 겉모습은
더욱 왜소하다.
60-70년대 난립상을 보이던 때의 증권사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직원수라야 고작 99명이고 지점은 7개뿐. 한지점당 많게는 11명,적게는
8명정도가 근무한다.
32개 증권사중에서 서열은 32위고 대주주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이
1백%다.
두회사는 그나마 커진 외형이 이정도이다.
따라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표현에 걸맞는 행보를 했는지,
현상유지에 급급했는지에 대한 평가를 내기기는 쑥스러울 정도다.
건설증권의 김부사장. 70년 입사해서 26년동안 줄 곧 몸담아온 건설증권의
산증인으로 오너와는 친인척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설증권은 손홍원전회장의 부친으로 재력가였던 손석중 선대회장이
자산관리를 위해 만든 회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김부사장에 대한 오너의 신임은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두텁다.
증권업계에서 김사장에 대한 평가를 듣기란 "백사장에서 쌀알 골라내는
격"이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입사이후 살림을 도맡아 해낸 탓에 증권업무에 통달한 팔방미인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큰 손"들을 관리하는데 탁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소형사로서는 아마 생존의 법칙이었을 것이다.
신흥증권의 이사장은 증권업계에선 다소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
금융계나 증권유관기관 출신이 많은 데 그는 한전 지점장 출신이다.
지성양회장과 공적인 관계로 만났지만 친분이 두터워 지면서 87년
신흥증권과 인연을 맺었다.
원불교 신자로서 업무외적인 얘기를 할 때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인생조언을 해줘 심금을 울린다는게 직원들의 평가다.
벌려 놓은 일이 적으니 챙기기도 수월해서 일까.
실무에 무척 밝고 그래서 "대충대충이 없는 분"이란 직원들의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들에게 한계는 분명히 있다.
오너의사에 반한 경영계획을 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하든 생존에 필요한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렇지만 각자의 색깔은 다소 차이가 있다.
지난해 임금협상을 놓고 건설증권의 노사가 갈등을 빚을 때의 일.
노조관계자가 낮은 임금수준에 대해 항의하자 김부사장은 "날더러 뭘
어쩌란 말이냐"라고 했다고 전해 진다.
운신의 폭을 반증해 주는 사례이다.
"건설주만 다루는 회사라서 건설증권이냐"라는 직원들의 자조감 섞인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사장은 제한된 여건에서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적지 않게 내고 있다.
지난해 직원 복지기금을 처음만들 때 20억원이란 적지 않은 금액을
흔쾌히 내놓기도 했다.
지회장의 3남으로 올 주총에서 임원승진한 지형룡이사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명확하다고 들린다.
이사장과 김부사장은 "경쟁과 생존"이란 두가지 테제를 놓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진 대표적인 증권사 경영인들이다.
고용사장이면서 회사 위상이 낮다는 점에서다.
작은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꼴찌 갈채론"의 대상이
되느냐,아니면 "안빈낙도,안분지족"을 좌우명 삼아서 이래도 응,저래도
응하는 목낭청이 되느냐는 두고 볼 일이다.
<박기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