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6일 확정한 95년도 예산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수립이후 처음
으로 정부빚을 갚기위한 흑자재정을 짰다는데 있다.

세입보다 세출을 줄이는 흑자재정은 다목적용 포석이다.

우선 경기안정이다.

내년에도 현재의 경기회복추세가 이어져 7-8%의 성장이 예상되고 물가
상승률도 6%를 넘어서 과열로 흐를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여기다 4대지방선거가 있고 해외자금유입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통화긴축 원화절상불개입 품목별 물가잡기등 일련의
안정화정책에 재정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재정의 경기조절기능을 회복한다는 얘기다.

또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경기가 침체할 때에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팽창적인 적자재정을 쓰고 싶어도 지금과 같이 누적적자(통합재정수지
기준)에 쪼들리는 살림살이로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정부빚을 갚아 놓는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통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경우 통일비용충당을 위해서
정부가 빚을 내야할 일도 있을텐데 여기에 대비해 지금부터 슬슬 빚더미
에서 벗어나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겠다는 장기적 배려도 깔려 있다.

공무원총정원을 동결하고 인건비를 6.8%이내에서 묶은 것이나 남북관계가
어려운데도 방위비를 증가율을 한자리수에서 저지 다는 점도 예산팽창을
억제하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진다.

빚을 갚기 위해 이처럼 돈을 뺄데는 빼면서도 쓸데는 썼다는 평가도 받을
만하다.

세출면에서 사회간접자본 환경 농어촌에 대한 예산지원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쟁력을 강화하고 맑은물공급을 뒷받침하는 한편 UR이후 어려워진 농어촌
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은 급변하는 여건변화를 받아들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올예산에서 주목되는 또다른 부문은 국방비등 성역에 손댔다는 점이다.

그동안 단 한줄로 예산요구가 와서 도저히 비리여부를 알수 없었던 전력
증강사업비(율곡사업비)를 지상 해상 항공전력등 5개분야로 나누어 심사
했다.

군이 사용하는 경상비용도 우선은 군사령부단위로 편성해 비용의식을 제고
시켰다.

다만 성역중의 성역인 안기부예산은 올해보다 34억이나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총액으로 편성돼 심사는 불가능했다.

그동안 지역기업이나 민간의 음성적 보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세무서나 경찰의 민원관련비용을 대거 현실화 한것도 깨끗한 정부를 구현
한다는 약속을 뒷받침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예산증가율이 지난해보다 높아
만성적인 팽창예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아직도 예산이 신규사업등 눈에 띠는 하드웨어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조직과 기능을 잘 살리고 예산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

예컨대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 사업에 예산배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예산안식년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나 유야무야됐다.

정부는 "작년까지의 예산개혁이 하드웨어의 개혁이었다면 내년 예산은
재정수지개선에 역점을 둔 소프트웨어적 개혁"(이영탁예산실장)이라고 설명
했다.

하지만 아직 정부가 손을 쓰지 못하는 예산운영의 효율성, 사회개발비등
명실상부한 소프트웨어에 좀더 치중해야 개발연대식 사업중심 예산편성에서
벗어나서 선진국형 예산의 모습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지자제의 본격실시에 대비해 지방과 중앙정부간의 역할을 제정립
하려는 노력은 많이 했으나 중앙부처의 반발에 밀리고 지역정부의 이기주의
에 치여서 실적은 별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직공무원을 지방직으로 돌리고 양여금과 교부금배정에 지방의 자구
노력을 연계했지만 지파출소운영경비나 지방문화재관리비등 지방사업을
지방정부재정에 맡기려는 시도는 일단 실패했다.

7개항만을 새로 건설하려는 계획을 내년으로 미룬 것은 이런 지방의
욕구를 수용하지 못한 미봉책으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내년에 지자제선거를 앞두고 있어 국회에서 지방정부에 대한 예산
지원을 추가로 요구할 때 이를 정부가 당초 의도대로 방어해낼지는 미지수
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