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어떻습니까" 요즘 은행지점장들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상반기 영업점평가결과가 어떻냐는 것이다. 이말에는 학생들이 친구의
시험성적을 궁금해하는것 이상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행여 결과가 나쁠라치면 하반기정기인사에서 "좌천"이란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발령"이나 "역"자돌림자리도 좌천의 한가지다.

이런 자리는 실적이 부진한 경우외에 사고나 부실대출을 일으켰을 경우에도
예외없이 돌아온다.

그래서 인사철이 은행원들에게는 겁나는 계절이다. K은행의 박모지점장
(50). 그는 요즘 "이제나 저제나"하고 있다.

이달중으로 예정된 하반기정기인사가 언제 나느냐를 꼽고 있는 것이다.
승진을 하거나 대형지점장으로 나갈 것이란 기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상반기영업점평가결과 불행히도 같은 그룹의 19개지점중
꼴찌를 기록했다.

다행히 지역본부 60여개점포에서는 꼴찌를 면했지만 불안한건 마찬가지다.
이런 불안감은 지난2월에도 느꼈었다.

작년하반기평가결과도 꽁무니에서 맴돌아서였다. 그때는 부임6개월이란
"정상"이 참작됐다.

이번엔 다르다. 지점장에 온지도 1년이 지났다. 영업환경이 나빠졌다고는
하지만 다른 지점도 다를바 없다.

잘해야 규모가 작은 점포로 "좌천"해 갈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본점
인사부조사역이나 업무추진역등으로 불려 올라가는 것.

그렇게 되면 최소 6개월간은 인고의 세월을 지내야 한다. 각종 섭외활동에
동원되면 그래도 낫다.

뚜렷이 할일없이 멍청히 자리나 지켜야 한다는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박지점장에게 "본점행"은 곧 "대기발령"을 의미한다.

하반기 정기인사철이 돌아왔다. 실적이 나쁜 점포장들에겐 이때만큼 불안한
때도 없다.

비슷한 규모의 점포끼리 순위를 매겨 꼴찌를 한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몇년전만해도 꼴찌점포장은 꼼짝없이 본부에 불려와야 했었다. 최근들어선
"징계"의 정도가 약해진게 사실이다.

그렇다고해도 상대평가인이상 꼴찌는 나오게 마련이다. 최근 은행들은 총
20여개 그룹의 최하위점포장을 모두 불러들이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지역본부의 꼴찌는 어떤식으로든 인사조치를 하고 있다.
은행당 최소한 6-7명은 본부의 "역"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실적이 연거푸 좋지않아 "개선의 정도"가 보이지 않으면 아예 정식으로
"대기발령"을 내기도 한다.

그래도 실적이 나쁜 지점장들은 나은 편이다. 6개월이나 1년만 한직에서
지내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대기발령"을 받는 사람들에 비해선 그래도 "보직"
이다.

김모씨(51)는 지난해 이맘때만해도 J은행의 지점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업자신세다.

김씨는 지난7월 정기인사때 관리부대기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8개월후인
지난3월 25년동안 몸담았던 은행을 떠났다.

김씨가 "지점장-대기발령-실업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지난89년. K지점장
으로 발령받으면서 부터였다.

A라는 도매업자는 2억여원이라는 거액을 예금해 주는 댓가로 5억원의
대출을 요구했다.

물론 담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A씨는 몇달후에 더 많은 예금을
해준다는 미끼로 담보해지를 요청했다.

한푼의 예금이 귀했던 김지점장은 이 미끼를 덜컥 물었고 이후는 위규대출
과 과다대출의 악순환이었다.

A씨는 처음엔 당좌교환자금이 모자라니 5천만원만 융통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도가 날판이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융통어음을 진성어음인양 할인해 줬다. 이러기를 수십차례. 대출금
은 어느새 12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A씨는 부도를 냈다. 김지점장이 손에 쥔것은 "관리부 대기
발령장"뿐이었다.

관리부에서 김씨에게 주어진 일은 문제대출의 회수. 어느정도 회수가
된다면 "재기"의 기회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김씨는 8개월동안 A씨를 찾아헤맸으나 결과는 "헛수고"였다. 그래서 예정된
수순인 "사직"의 길을 걸었다.

부실대출. 은행원들에게 이보다 싫은것은 없다. 고의는 아니더라도 대출
과정에서 위규가 발견되면 "대기발령"이나 "역"자돌림자리로 가야한다.

은행들은 위규대출이 적발되면 인사부대기나 관리역 조사역등으로 이들을
불러들인다.

지점장은 물론이고 차장 대리 행원이라도 도장을 찍은 사람이면 예외를
두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현재 은행당 10명은 넘는다. 실적부진으로 비슷한 신세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20명이 할일없이 "눈치밥"이나 먹고 있는 셈이다.

대기발령. 은행원이면 누구나 이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산다. 이런
심리적불안이 "보수의 대명사"라는 별칭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른 더위가 판치는 요즘 은행원들에게 김일성북한주석의 사망소식
은 정기인사결과 다음 관심사일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