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다 어린이들을 상대로한 영어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영어테이프 비디오테이프 교재도 범람하고 있다. 강남의 어느
아파트단지엔 어린이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들만도 수십명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학부모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자녀를 "영어의 숲"으로 내 모는등
영어조기교육 열풍이 불고있다.

해방이후 미군정이 실시되고 그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전분야가 미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면서 영어는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영어를
잘하면 지식인 지도자로 존경받고 영어를 못하면 괜시리 주눅이 들어야
했던게 과거에도 오늘도 "우리네 현실"이다.

해방이후 초창기 영어교육의 선구자역할을 해온 황찬호 서울대
명예교수(71)를 찾아봤다. 지금은 산본의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면서 순수
우리말 영한사전 편찬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황교수는 일제시대 연희전문
영문과를 졸업한뒤 일본군에 강제 징용돼 일본군 소위계급장을 달았던 적도
있다. 해방뒤 서울대문리대영문과를 다시 다녀 학사학위는 둘이지만
박사는 커녕 석사학위없이 87년 정년퇴임까지 서울대교수를 지냈다.
-선생님은 해방이후 우리나라 영어교육을 개척하신 분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당시의 영어교육은 어땠습니까.

<>황교수=일제때부터 내려오는 문법위주의 해독방식이었지요. 말하기나
듣기같은 개념도 없었죠. 그저 읽고 해석하는 거,그게 영어교육의
전부였지요.

-그런 역사때문에 영어교육은 오늘날까지도 죽은교육이 됐다는 지적도
있죠.

<>황교수=그건 구조주의 언어학의 영향이 컸던 탓이지요. 문형연습위주
교육 입니다. 교과서도 다 그런 식이었지요. 촘스키의 변형문법이 나중에
한창 유행했으나 결국 언어교육의 본질이 해결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이 더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요.

<>황교수=물론입니다. 한교실에 50여명씩 모아놓고 훈련도 안된 교사가
회화연습을 시켜본들 됐겠습니까. 우리 교육은 이래왔죠. 그러나 우리
영어교육은 서구논리나 사상을 흡수하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간접적 영향이긴 합니다만 일본의 근대화도 영어교육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영어교육도 이런 점에서 기여한바가 크다고
봅니다.

-요즘은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까지 영어를 가르치고 있죠. 영어조기교육을
어떻게 보십니까.

<>황교수=찬성할게 못됩니다. 영어를 잘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실용영어를 잘 한다고 모두 무역이나 외교에 종사할 수는 없는거지요.
거기에 필요한 인원만 교육하면 됩니다. 과거엔 영어가 영미의 힘에 눌려
사는 속국이나 식민지가 받아들인 "권위언어"였지요. 그러나 영어는 지금
지배언어가 아닙니다. 공통언어라는 개념으로 봐야지요. 영어회화만 잘
하면 다 되는 것처럼 믿는데 그냥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면될 문제를 유치원
국민학교때부터 할 필요가 있겠어요.

-영어번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교수=번역도 필요한 엘리트들이 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영어교육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이었다고 볼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요. 재래식의 영어교육방식이라도 제대로
효과있게만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이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할수 있지요. 때문에 학교에서 당장 성과를
내겠다고하면 영어교육은 큰 착각이지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족수가
산출된다면 중학교때는 영어를 의무교육으로 하되 고등학교때부터는
선택과목으로 만들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학의 영문과는 어떤가요. 너무많고 학생들도
너무 몰리는건 아닌지요.

<>황교수=사실 우리나라엔 영문과가 너무 많은것 같아요. 영문과는
영미문학과 영미언어학이란 학문을 하는 곳인데 그 많은 사람이 영미문학을
전공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영어번역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번역수준은
어느정도인가요. 일본어로 된 번역판을 보고 중역한 경우가 많은것도
문제일텐데요.

<>황교수=그래서 웃지 못할 오역도 많이 나왔지요. 층계를 오를때
쉬어가는 "층계참"을 영어로는 랜딩(landing)이라고 하는데 일본말로는
이것을 오도리바(용장.무도장)라고 번역하거든요. 그래서 "층계참을
통해서 자기 방에 갔다"(He went into his room throush the landing)고
해야 할것을 "무도장을 통해 자기방에 갔다"고 오역한것도 있지요.
심지어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할 때도 시간에 쫓겨 일본어판을 보고
번역을 하다보니 "나는 태연하다"로 해야할 것을 "나는 평기다"라고
일본말을 그대로 옮긴 일도 있었지요.

-영한사전에도 그런 중역에 의한 오역이 많다지요.

<>황교수=우리나라 영한사전이 대부분 영일사전을 베낀 것이거든요.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한문 쓰기를 좋아합니다. 베끼다 보니까 일본말을
오역한것 투성이였죠. 한자어만 잔뜩 있고 순수한 우리말은 없어요.

-예를 좀 들어주시지요.

<>황교수=ambiguous라는 단어는 "애매한"이라고만 번역했지
"알쏭달쏭한"이란 우리말로 옮겨놓지는 않거든요. 이것말고도 많습니다.
"혼란한"이라고 번역된 disorderly도 "어수선한"이라고 바꾸어야하고
"희극배우"라고만 번역하는 funnyman을 "어릿광대"라는 순우리말로
바꿔야지요. 지난 87년에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마 1만단어이상은 정리했을 겁니다.

-선생님은 영어학자라기 보다는 국어학자라 해야겠네요. 국어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야 그런 작업이 가능할게 아닙니까.

<>황교수=사실 정년퇴임을 하면 우리말 시어사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일본말에는 시어가 굉장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단어마다 시에서 쓰는 말이
따로 있어요. 우리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따로 정리해서 시인들이 예문을
붙이면 훌륭한 시어사전을 만들수가 있어요. 그렇게 하면 우리말의 정화나
아름다운 말은 절로 말들어지게 돼요.

-교수님은 연구생활후반기엔 영어교육보다 문학연구에 힘쓰셨다지요.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이라는 영국소설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국내에 소개하셨는데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요.

<>황교수=6.25동란때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할때 미고문관과
말다툼을 벌인일이있지요. 사병들이 훈련을 받는데 열심히 안하고 적당히
하는것 같다면서 우리나라사람들을 비웃더군요. 그래서 슬그머니 화도나고
해서 "한달에 봉급 몇백원받고 훈련하는 사병들이 미군처럼 사기가 오를수
있겠느냐"고 따졌죠. 나도 겨우 1만5천원밖에 못받는다면서 그를
공격했지요. 미고문관이 깜짝 놀랄수밖에요. 그가 날보고 어떻게
살아나가느냐고 해서 번역아르바이트도 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고문관이 미국출장길에 그린의 "사건의 핵심"(Heart of the Matter)이란
책을 사다 주더군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니까 그걸 번역하면 돈을
벌거라면서요. 그책을 읽다가 그린에게 끌려들어가게 됐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선생님을 매료시켰습니까.

<>황교수=그린은 원래 가톨릭신자이자 종교작가입니다. 자칫 종교적
고정관념에 집착하며 포교문학으로 흐르기 쉬운 종교문학에서 "인간조건"을
끝까지 파헤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톨릭적 실존주의작가로 분류됐고
내가 좋아하게 된겁니다.

-그러나 그린은 노벨문학상은 못받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교수=맞습니다. 그는 가톨릭적 실존주의작가였지만 소설의 결론은
항상 이때문에 노벨문학상후보에 일곱번이나 올랐는데도 끝내 실패하고
재작년에 타계하고 말았지요.

-육사교관을 하셨다니까 말씀입니다만 그당시 전두환 노태우생도가 모두
대통령이 되었고 또 지금은 사정의 대상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는데.

<>황교수=좀 착잡합니다. 제가 돈복이나 처복은 없어도 제자복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제자중에 두명씩이나 대통령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5공때는 각료중에 9명이 제자였던적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어학연구소 일을 하신다지요.

<>황교수=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우리말을
가르칩니다. 서울대 어학연구소에서 우리나라에 유학온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국내에 있는 외국유학생은 얼마나 되나요.

<>황교수=약1천명정도 됩니다.

그중에선 특히 후진국학생이 많습니다. 몽골 구소련,아프리카의
코트부아르등에서도 학생들이 몰려 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우리나라도
이젠 정책적으로 후진국유학생을 유치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길러내면 본국에 돌아가 출세할게 분명합니다. 물론 친한파가 돼
있을테니 그들나라와 무역을 하는등 우리경제에 도움이 될 겁니다.
후진국학생을 유치할수 있는 재단을 하나 만들었으면 합니다.

-일제때 교육을 받고 격변기를 살아온 원로세대로서 최근의 개혁이나
사정을 어떻게 보십니까.

<>황교수=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국운이 제대로 잡히려나보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혁이 성과를 거두려면 개인의 리더십
하나만 가지고 안됩니다. 국민의 협조가 필요해요. 개인의 리더십에 너무
의존하다보니까 모두가 관망을 하게 되고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슬슬
눈치보며 저항할 기회만 기다리는 것같은 감이 듭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갖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낀 겁니다만 일본엔 사회기강이나 원칙이
있어요. 그래서 잘 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기강이나 원칙이 무너져 있거든요. 일제를 거쳐온
세대의 한사람인 나는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봅니다.

-일흔이 넘은 연세인데도 무척 건강하시군요.

<>황교수=틈날 때마다 테니스를 칩니다. 또 큰 욕심 안부리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