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을 떠들썩하게 한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미술품 기증 이후 관련 전시가 계속 열리고 있다. 전체 컬렉션의 가치가 얼마니 하는 얘기는 잠시 미뤄두고, 컬렉터로서 이건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Art] 컬렉터 이건희의 뒷모습
벨기에 출신 아트 컬렉터 장 빌리 메스타슈(Jean Willy Mestach)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당신이 무엇을 수집했는지 알려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이는 수집가가 시간과 돈을 들여 모아온 수집품은 그의 세계관과 안목을 알려주는 증거라는 말이다. 아울러 수집품을 어떤 방식으로 모으고 보관했는지 보면 그의 성정 또한 짐작이 가능하다. 물론 ‘컬렉션’이라 부를 만한 거대한 부와 수집품을 가진 사람들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알려진 대로, 지난해 이건희 회장의 타계 이후 그의 방대한 컬렉션이 국가에 기부됐다. 작품의 총 숫자는 2만3283점. 전체 가치는 약 3조 원에 이른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컬렉션에는 겸재 정선과 김홍도, 이중섭, 김환기 등 국내 최고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모네와 르누아르, 샤갈, 달리 등 미술 역사서에서나 볼 법한 화가의 대표 작품이 대거 포함돼 있다. 그의 기증품만으로 국가 규모의 미술관을 설립할 수 있는 수준이다. 누군가는 ‘돈 많은 재벌’이라는 편리한 말로 그의 컬렉션을 폄하하겠지만, 이 정도 규모와 양을 수집하는 것은 아무리 이건희 회장이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술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재벌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늘었지만, 삼성가(家)는 아주 오래전부터 관심의 범위가 남달랐다. 시작은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재벌이기 전에 골동품 시장에서 가장 파워풀한 컬렉터 중 한 명이었다. ‘좋은 물건이 나왔다’는 소식은 가장 먼저 그의 귀에 들어갔고, 터무니없는 가격이 아니면 구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 소장품, 그리고 현재 기증된 한국 고미술 중 상당수는 이건희 회장 이전 이병철 회장이 구입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최고 수준의 예술품을 접해온 이건희 회장의 안목이 높았을 것임은 자명한 일. 예술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과 경험치가 자연스레 길러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재계에서 문화와 예술의 힘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식한 사람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의 방향성
재미있는 점은, 이건희 회장의 엄청난 수집품에 특정한 흐름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통적 컬렉터의 수집품에는 어느 정도 일관된 흐름이 있다. 수집에는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취향이 수집품에 묻어난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리스트에는 특정 작가나 사조의 작품을 모았다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꾸준히 모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이는 이건희 회장의 인재 철학과 이어진다. 그는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고 말할 정도로 특급 인재에 관심이 높았다. 실제로 삼성 계열사 고위 임원들은 국내 대기업은 물론 다른 글로벌 기업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연봉과 대우를 받았다. 이건희 회장의 이러한 ‘명품 우선주의’는 미술품 수집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림도 동시대 최고 대표작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명 작품이 있어야 컬렉션의 전체 리스트가 훨씬 가치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사람도, 예술도 ‘최고’를 잡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건희 회장은 작품의 가격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1976년부터 이후 20여 년간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과 박물관 건립을 주도한 이종선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2대에 걸쳐 국보급 문화재 150여 점을 수집하고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지난 2016년 <리 컬렉션>이라는 책을 발매했는데, 이 책에는 삼성가의 미술품 담당으로서 겪은 일화가 담겨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은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해 시세보다 너무 비싸다고 느껴지면 구입을 포기하거나 미뤘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일단 꽂히면 작품 가격이 얼마든 흥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는 최고 작품에는 가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철학이었다. 그러니 이건희 컬렉션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을 발견하는 건 애초에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전체 컬렉션의 조화나 균형보다 누가 봐도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소수 작품이 전체 컬렉션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믿었다.
물론 이 방대한 컬렉션을 이루기까지 문제가 된 점도 있었다. 일부 작품은 구매 과정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보급 문화재의 경우 입수 과정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자금 출처나 구매 경로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은 오랫동안 시민단체 등의 공격을 받아왔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보통 이런 국보급 골동품은 장물로 시작해 어둠의 경로로 유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아무리 이건희 회장이라 해도 이런 작품을 공개적으로 구매하기는 힘들다. 반대로 생각하면, 원하는 작품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윤리적 비난은 감수할 의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뜻도 된다. 실제로 그는 많은 임원의 반대에도 자신의 관심사였던 자동차와 카메라, 오디오 등의 산업에 진출한 바 있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시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앞서 누군가 수집한 제품을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희 컬렉션은 그의 성정을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자인이 약하면 상품 경쟁력이 떨어진다” 등 그가 삼성의 총수로서 주장해온 초엘리트 중심주의, 디자인 경영 등은 그의 컬렉션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화를 이해했던 경영인
지난 1년 동안 이건희 컬렉션 관련 전시가 가져온 파장은 컸다. ‘미술 전시’라는 단어가 이렇게 대중적으로 자주 사용된 적도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효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그의 기증 소식에 화답이라도 하듯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국립 이건희 미술관(가칭)’을 설립하기로 했다. 그의 기증품으로만 운영될 미술관이다. 벌써부터 ‘이건희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립미술관을 지을 이유가 뭐냐?’는 등의 반대도 이어지지만,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오랜 시간 모아온 엄청난 수집품을 기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미술관 이름에 기증자 이름을 넣어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 흐름을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기업이나 국가의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 한 말이다. 그는 실제로 20세기 산업화 시대가 문화 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가장 잘 이해한 경영인이었다. 그가 긴 시간 쌓아온 문화의 흔적은 국가에 귀속됐고, 이제 후대에 계속 가치를 전달할 것이다. 컬렉터로서 이만큼 의미 있는 일도 없다.
한편, 지난해 7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은 지난 4월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관람객의 반응이 좋아 6월 6일까지 전시를 연장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 8월 28일까지 열린다.

글 이기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