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메인 포스터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메인 포스터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위인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사람이지만, 정작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었는지는 업적의 그림자 뒤로 가려지기 쉽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 지점에 주목해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를 만들었지만 역사로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감춰진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영화로는 최초의 시도다.

대동여지도를 포함해 그의 다른 작품 대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김정호의 기록은 모두 합해도 A4 용지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자료가 전혀 없다시피 해 김정호는 어쩌면 ‘유령 같은 존재’다. 이에 강 감독은 박범신 작가의 원작 소설 ‘고산자’를 토대로 뼈와 살을 붙였다.

강 감독은 그를 정확한 지도를 보급하려 했던 ‘애민 정신’이 가득한 인물로 해석했다. 그는 “아직 못 가본 길이 갈 길 입죠”라고 말하며 어디로든 만인을 위한 지도 제작이 필요한 곳이라면 훌훌 길을 떠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3년 반여의 기간을 떠나있던 집을 돌아와서는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딸 순실은 “내가 더 중해요, 지도가 더 중해요”라고 묻지만 강 감독이 그려낸 김정호는 끝내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아내와도 같던 여주댁(신동미)에게도. 영화의 스토리는 이토록 애달픈 김정호 개인의 삶과 얽혀 들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개인사를 떠나, 권력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민생의 삶도 대변하는 듯한 김정호의 삶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욱 공감을 산다. 김정호는 잘못된 지도로 죽음을 맞게 된 아버지와의 트라우마로, 그리고 자신의 순수한 의지로 만백성을 위한 국민 지도를 만들려고 하지만 이는 곧 60년 세도가와 흥선대원군 사이 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김정호는 순식간에 ‘나라를 팔아먹은 대역죄인’으로 몰리고, ‘가라는 대로 가고 오라는 대로 오면 될 것이지, 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 지도는 알아서 뭐해’라는 권력가의 알량한 말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이에 그는 ‘알 건 알아야 피난도 가고, 제나라 백성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는가’라는 ‘사이다’같은 말을 내뱉으며 보는 이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인간 김정호뿐 아니라 동시대에 존재했던 흥선대원군(유준상)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와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바조차 없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앞세워 권력의 실세로서 조선을 장악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고 당시 세도가와의 권력 싸움에 맞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사수하려 애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준상의 연기력과 함께 배어 나오는 그의 인간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고민이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무엇보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관전포인트는 우리나라의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 스크린으로 담아낸 절경이다. 강 감독은 지난 8월 30일 열린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기자간담회에서 “사람들이 자꾸 CG 아니냐고 하는데 자연경관 부분은 CG가 하나도 없다. 철탑이나 전기선을 지우는 정도였다. 다 발품 팔이 해서 찍은 거다. 계절 변화를 다 기다려가며 찍었다. 지도만큼이나 영상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끝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라고 밝혔다. 과연 스크린에서는 강 감독이 자부심 가질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영화에서 김정호가 백두산의 천지를 발견한 후 눈물의 기도를 흘렸던 것만큼, 보는 이도 그 장엄한 모습에 이루 말로는 할 수 없는 장엄함을 느끼게 된다. 감동은 봄의 철쭉이 흐드러진 합천 황매산까지 이어진다. 제작진이 5개월여의 기간을 기다려야 담을 수 있었다는 황매산은 가슴에 먹먹한 풍경을 남긴다.

단, 금강산 절경은 담지 못했다. 강 감독은 “방북 신청을 할 때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서 금강산에 못갔다”며 “그래도 백두산을 찍어서 굉장히 위로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저런 아쉬움은 영화가 후반부에 다다를 무렵 ‘그 미친 지도쟁이,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가 한양의 저잣거리에 펼쳐질 때 눈 녹듯이 사라진다. 지도의 장엄함에 절로 몰려든 백성들이 무심코 뱉은 말처럼 보는 이 또한 ‘우리나라가 이렇게 생겼었나’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근대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꾼인 김정호가 그려낸 보물 제 1581호의 모습은 강 감독이 “보는 순간 기절할 뻔 했다”고 밝힐 만큼 지도 그 이상의 느낌을 전달한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스틸컷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스틸컷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A4 용지 한 장 분량 밖에 남아있지 않는 김정호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가 그의 삶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영화적 재미까지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그가 1차원적인 개그에만 그쳤기 때문이다. 주연 배우가 차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삼시세끼 내가 다 해줄수도 있는데”라는 대사가 나오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현대라는 이유만으로 지도라는 콘셉트를 이용한 21세기의 내비게이션을 반영한 ‘대동여지도 확장판’ 코미디가 등장한다. 당사자는 물론 그가 만들어낸 지도까지 굴곡진 삶을 살았던 위인의 무게감에 짓눌린 탓일까.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짜릿한 유머나 재치, 스릴이나 반전이 결여됐다.

강우석 감독은 “대동여지도에 담긴 김정호 선생의 철학과 생각을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면 대단한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교육적인 가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재미적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단순한 전개이기에 러닝 타임 129분은 길고도 길게 느껴진다. 오는 7일 개봉.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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