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 메인 포스터 / 사진제공=NEW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 메인 포스터 / 사진제공=NEW
대한민국에 서울역만큼 극적이고도 상징적인 역사(驛舍)가 있을까.

지난 한 세기 동안 근대 한국 사회의 태동을 함께했으며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를 움직이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도착점, 경쟁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노숙자들과 그 비루한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돔과 아치가 웅장하게 서 있는 곳. 연상호 감독이 서울역에서 매력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 감독은 이 ‘서울역’이라는 공간을 모태로 환상적인 좀비 도시 괴담을 펼쳐냈다. 앞서 개봉했던 ‘부산행’보다 훨씬 어두운 색채로.

연 감독의 작품이 기대되는 건 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는 그 특유의 시선 때문이다. 그는 사회를 조각조각 구성하고 있는 모순들을 날카롭게 파고든 후, 그것들을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재구성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는 ‘서울역’에는 ‘서울’이라는 공간을 살아가면서 심야 뉴스에 한 토막씩 나올 수 있는 사건들의 총합을 좀비라는 장르와 결합해 담아냈다고 지난 10일 ‘서울역’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영화 ‘서울역’ 스틸컷 / 사진제공=NEW
영화 ‘서울역’ 스틸컷 / 사진제공=NEW
‘서울역’의 이야기는 집을 나온 소녀 혜선(심은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집에서 가출한 뒤 마땅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서울역 인근 여관방에서 살고 있는 이 소녀는 ‘열외 인간’ 그 자체다. 집에서도, 집을 나와서도 청소년으로서 받아야 할 어른의 보호에서 열외된 채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려 애쓴다. 하지만 남자친구 기웅(이준)은 혜선을 생존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고, 그를 거부하려고 하면 혜선에게 남은 삶의 선택지는 노숙자뿐이다. 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악순환은 소녀를 좀비처럼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살아있는 시체’로의 탄생이 혜선에게 비로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준다는 설정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집’과 ‘가정’의 간극도 ‘서울역’이 던지는 주요 화두 중 하나다. 집에는 가정이 존재해야 함이 옳지만, 현실은 자기 살기 바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따뜻함을 지닌 집이 늘어가는 실정이다. 집이 텅텅 빈 껍데기가 되어가는 것이다. 마치 ‘부산행’ 속 석우(공유)의 집처럼. 이러한 모순 정 가운데에 위치한 것이 ‘모델하우스’다. ‘가장 이상적인 집’을 보여주려 세워졌지만 그 내부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으며 ‘열외 인간’들에게는 현실과 우주만큼 동떨어져 있는 이질적인 집.

영화 안에서 혜선과 노숙자는 좀비들에게 쫓기며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집에 가고 싶다 말한다. 석규(류승룡)은 모델하우스에서 문득 “나는 언제 이런 집에 살아보냐”라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연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역’에서는 집, 가족에 대해 내가 살면서 느껴왔던 현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산행’은 (집, 가족이) 이래야 되지 않냐 라는 당위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부산행’과 ‘서울역’은 메인 테마가 집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이야기들이) 어떤 배경에 어울릴까를 생각해봤을 때, ‘가정으로써의 집’이 아닌 겉만 번지르르한 집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모델하우스를 선택했다”라며 모델하우스를 배경 중 하나로 설정한 의도를 전했다.

‘서울역’에는 대한민국을 뒤덮은 좀비 재앙이 시작되는 과정 또한 흥미롭게 그려진다. ‘서울역’에 등장하는 최초의 좀비는 서울역 안의 응급 센터와 경비에게 가볍게 외면당한다. 그 후, 좀비가 좀비를 낳으며 대형 도미노가 쓰러지듯 그 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최초의 좀비를 살리려 한 그의 노숙자 친구는 “아저씨들이 내 말 안들어서 우리 형님 숨이 넘어가 버렸다고”라고 외치지만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이는 국민 개개인에게 닥친 재난을 대하는 정부의 무관심과 무시를 꼬집는 은유다.

이미 좀비가 창궐했지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도심 곳곳에 차벽을 세운 후 ‘반동 분자’처럼 보이는 이에게 물대포를 난사하는 장면에서는 지난 해 서울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온갖 공권력은 대동하고 나타났지만 결국 좀비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국민들이라는 것이 그저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점. “난 한평생 이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란 말이야. 난 착한 사람이야”라는 한 중년 남자의 외침이 오히려 코미디로 다가온다는 점은 머릿속에 씁쓸한 잔상을 남기는 순간이다. 연 감독이 ‘서울역’에서 제시한 마지막 모순은 영화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며 ‘부산행’ 전날 밤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도무지 더위가 가시지 않는 요즘 색다른 피서를 찾고 있다면 이 매혹적인 서울역 좀비 괴담으로 열을 식혀보길. 예측할 수 없는 좀비들의 행동, 사실적으로 빚어 낸 현 사회의 비열한 모순, 반전이 선사하는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시원한 쾌감을 안겨줄 것이다. 게다가 93분 동안 이야기를 전달해 줄 이는 전작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스토리텔러다. 오는 17일 개봉.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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