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한효주
한효주

영화 ‘해어화’의 시작과 끝에 한효주가 있다. 그 동안 청순하고 단아한 면모를 주로 노출시켜 온 이 배우에게, 집착과 질투와 욕망과 허무함이 뒤섞인 소율이라는 캐릭터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한효주는 그런 부담을 이겨내고 영화 속에서 풍부한 감성의 결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한효주는 앞으로 더 용감하게, 터프하게, 들쑥날쑥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더 다채로워질 한효주를 기대한다.

10. 먼저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 역할은 처음이 아니다. ‘반창고’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여자를 연기했었으니까. 구애 하는 쪽과 구애 받는 쪽. 연기할 때, 많이 다를 것 같다.
한효주: 아무래도 사랑 받는 쪽이 좋다. 혼자 하는 사랑은 너무 괴롭지 않나. 사랑 받기 위해 안절부절… 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10. 멜로드라마 여주인공 중에, 사랑 받는 캐릭터보다 구애하는 캐릭터가 더 희귀한 게 사실이다.
한효주: 맞다. 여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 이 시점에서, ‘해어화’는 여성 캐릭터들이 굉장히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연기적으로 뭔가를 더 보여드릴 수 있겠다 싶었다. 극적인 연기를 요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그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그 동안 내가 해 온 연기는 뭐랄까.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느낌의 연기가 많았다. 그런 패턴의 연기가 여전히 좋기는 하다. 그럼에도 한번쯤 극적인 연기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10. 완성된 ‘해어화’를 어떻게 봤나. 연기할 때의 느낌과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한효주: 확실히 새로운 모습이었다. 사랑 받지 못해 처절하게 울부짖는 얼굴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라 새로웠다. 나에겐 여러 의미에서 도전인 작품이었다.

10. 어떤 부분이 특히나 도전이었나.
한효주: 심적인 부담이 가장 많았던 건 마지막 노인 분장. 부담감 때문에 촬영 전날, 잠도 거의 못 잤다.

한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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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노인분장을 두고 박흥식 감독님과 의견이 조금 엇갈렸다고 들었다.
한효주: 촬영 직전까지 내가 노인 분장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고민이 많았다. 영화의 맥락과 감정의 흐름을 방해하면 어쩌나 두려웠기에. 감독님은 처음부터 확고하셨다. 1시간 50분 넘게 영화를 끌고 온 사람이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셨다. 결국 감독님에게 설득된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그렇게 좋은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라는 대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배우로서의 책임감도 있었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내가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책임감.

10. ‘주연배우가 노인 시점까지 직접 연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늘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다. 영화 ‘사도’에서는 문근영(혜경궁 역)이 직접 노인 분장을 하고 마지막에 등장했다. 반면 ‘늑대소년’에서는 박보영이 연기한 순이의 중년 시점 연기를 다른 배우가 했다. 당시에도 영화의 선택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한효주: 동의한다. 어떤 결정이든, 아쉬웠을 것 같다. 확실한 건 노인분장을 위해 정말 많은 분들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분장팀은 말할 것도 없고, 조명팀과 촬영팀 등 스태프들이 긴 시간 공을 들였다. 첫날은 분장에만 5시간이 걸렸다. 배우로서도 진귀한 경험이지 않았나 싶다. 노인분장을 하고 마지막 대사를 했을 때,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캐릭터가 가깝게 다가왔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10. 친구 연희(천우희)에게 느끼는 재능에 대한 열패감, 사랑에 대한 질투 등 소율은 감정적으로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한효주: 첫 미팅 때 감독님이 그러셨다. “이 영화는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이야기”라고.

10.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아닌?
한효주: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고일 정도로 마음에 콕 박혔다. 캐릭터가 더 처절하게 다가왔달까. 누군가에게 재능을 인정받는다는 게 이토록 값진 거구나, 새삼 느꼈다.

10. 사랑보다는 재능에 대한 질투가 더 컸던 인물로 소율을 바라 본 건가.
한효주: 전체적으로 보면 세 남녀의 얽히고설킨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인이 되고 싶었던 기생의 이야기라고 봤다. 소율에겐 노래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사랑의 감정과 대등하지 않았나 싶다. 노래에 대한 욕망이 크면 컸지 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율은 기생을 예인이라 믿었던 인물이다. 그 믿음이 깨지면서 소율의 삶에 하나 둘 균열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잃었을 때, 여자의 변화랄까. 난 소율의 변화가 이해됐다.

한효주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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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율의 감정은 충분히 설명됐다고 본다. 다만 소율과 삼각형을 이루는 연희와 윤우(유연석)의 감정이 조금 아쉽긴 했다. 편집과정에서 그들의 사연이 많이 생략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것들이 조금 더 부각됐으면 했다.
한효주: 사실, 그 부분은 나도 조금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우희 씨가 연기를 너무 잘 해줘서 어느 정도 설득력이 확보되지 않았나 싶다.

Q. 말한 대로 소율의 삶은 점진적으로 균열된다. 어떻게 그 변화를 표현하려 했나.
한효주: 영화적으로 얼마나 표현됐는지 모르겠지만 연기할 때 가졌던 마음은, 소율을 초반에 아주 순수하고 어린 아이 같은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이성적이거나 성숙한 인물이었다면 고난이 닥쳤을 때 현명하게 피해가거나 이겨냈을 텐데, 소율은 너무 순수하고 경험이 없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한 쪽으로만 흘러간다. 본인도 뭘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10. 소율은 연애 스킬이 많이 부족한 여자다.(웃음) ‘쎄시봉’ 민자영(한효주)이었다면 소율에게 나름의 연애코치를 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한효주: 와, 그렇겠네. 민자영이라면 소율처럼 안 했을 거다. 남자 머리 위에서 조금 더 영리하게 복수 하지 않았을까 싶다.(웃음) 소율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다.

10. ‘쎄시봉’에서 순진한 근태(정우)의 사랑을 안 받아주고 괴롭히더니, 이번에 그 죄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웃음)
한효주: 하하. 캐릭터를 캐릭터로 갚았다.

10. 당신은 2005년 시트콤 ‘논스톱’을 통해 TV에 데뷔했다. 스무 살이 되던 이듬해에 윤석호 감독의 계절 시리즈 ‘봄의 왈츠’ 주인공까지 꿰찼다. 많은 여배우들이 탐내는 작품이었다. 아마 그 시대 많은 여배우들에게 당신은 연희였을 거다.
한효주: 오……. 정말 그렇네. 그땐 뭐랄까.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 같다.

한효주
한효주

10. 설마 ‘운’ 뿐이었을까.
한효주: 당시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힘들었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10. 의외의 대답이다.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을 텐데.
한효주: 너무 영광스러웠지. 너무 감사했고.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한계에 부딪히는 시간이었다. 촬영장이 너무 무서웠다. 스태프들 앞에 서는 게 무섭고, 스스로가 안타까웠다. 너무 잘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연기가 안 되니까. 촬영장에 도착해서 차 문을 여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차 안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10. 지금의 한효주를 생각하면, 신선한 이야기다.
한효주: 그때는 그랬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항상 좋은 선택들을 받았다. 그래서 항상 나와의 벽에 부딪히고 깨지고, 부딪히고 깨지고…그 연속이었다.

10. 치유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극복했나.
한효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 받는다고 하는데, 작품도 마찬가지다. 다음 작품들을 통해 치유 받았던 것 같다.

10. 어떤 작품이 큰 도움을 줬나.
한효주: ‘아주 특별한 손님’(2006)이라는 영화를 찍는 동안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배우로서의 자세, 캐릭터에 대한 접근 방식 등 그 영화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내겐 치유의 영화였다.

한효주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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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본인이 가진 능력보다 항상 좋은 선택들을 받아왔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그 생각을 하나.
한효주: 지금은 연기가 재미있어졌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아져서 인 것 같다. 옛날에는 마음은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힘들었다. 지금은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 있어서 재미있다. 캐릭터에 살을 붙여 가면서 이런 저런 시도도 해 보고, 제안도 한다. 이젠 연기를 즐기게 된 것 같다.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웃음)

10. 영화의 배경인 기생학교 ‘권번’이 인상적이다. 오늘날의 연예 기획사와 비슷하다고.
한효주: 많이 비슷하다. 지금의 매니지먼트에 학교를 살짝 가미한 느낌이랄까. 연기를 하면서 권번에 대해 알아봤는데, 커리큘럼이 굉장히 빡빡하게 돼 있더라.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일본어, 춤, 노래, 악기, 체력단련은 물론, 시조 읽는 수업도 있었다. 그걸 4년을 배운다. 시험은 정기적으로 보는데, 떨어지는 사람은 나가야 했다.

10. 오디션 같다.
한효주: 비슷하다. 학비도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학비를 못 낸 사람 중에는, 기생으로 머리를 올린 후에 갚는 경우도 있더라..

10. 당신도 오디션을 많이 봤나.
한효주: 나는…나는 많이 안 봤다.(웃음)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10. 소율이 연희에게 느끼는 질투처럼, 혹시 배역 중 탐났던 게 있다면?
한효주: 할리우드 캐릭터 중에는 탐나는 게 많다. 갑자기 떠오른 캐릭터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너무 멋있다. 그런 캐릭터라면 파격변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효주06
한효주06

10. 퓨리오사라. 여려 보이는 당신이라, 잘 매치가 안 된다.(웃음)
한효주: 몸을 만들면 된다. 할 수 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웃음)

10. 그러고 보니 ‘감시자들’에서 액션 연기를 선보이긴 했다.
한효주: 조금 더 하고 싶다. 조금 더 극적으로. ‘감시자들’에서도 맛보기만 보여준 느낌이거든. 액션-스릴러 장르를 잘 할 자신이 있는데, 그렇게 안 보이나 보다. 들어오는 시나리오 캐릭터 대부분이 유하다.(웃음)

10. 우리나라 전통 가곡인 정가(正歌)와 대중가요의 대립도 흥미롭다. 정가 틈새로 대중가요가 빠르게 자리 잡았고, 이를 두고 예술가들의 선택과 운명도 엇갈렸다. 이는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기존의 기준들이 새롭게 들어오는 것들로 인해 빠르게 변한다. 배우는 그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노출된 존재들인데, 그럼에도 당신에게 ‘이것만은 지켜야지’ 하는 기준이 있다면 뭘까.
한효주: 나는 매 순간이 새로운 것 같다. 보시는 분들은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연기에 대한 특정한 패턴이 없다. 현장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시나리오에 대한 첫인상이다. 첫인상이 주는 강렬함. 연기하다가 혼란이오면, 첫인상을 떠올리는 편이다.

10. 아까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연기가 좋다고 했는데,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 같다. 그게 한효주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거든.
한효주: 좋다. 꾸미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걸 좋아한다. 그래서 고민이다. 그런 연기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도전한 게 ‘해어화’인데, 장르적인 영화들에 조금 더 도전해 보고 싶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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