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포스터/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포스터/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텍스트는 친절해졌다. 아니면 텍스트가 친절해지면서부터 생각하기를 멈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서적 교감이나 안목 없이 기계적으로 재구성된 텍스트는 독자의 정서까지도 균일하게 짜깁기 한다. 텍스트의 친절함이 도식화되고, 독자들이 익숙해질 즈음 텍스트는 더 복잡해지기보다는 조금 더 자극적으로 텍스트를 비꼬는 방식을 택해왔다. 기괴하고 충격적이지만, 정서적 동감을 얻어내지는 못하는 얕은 텍스트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더 적극적 상상과 개입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그 원초적 쾌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영화가 나타났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허무맹랑함을 바탕으로, 영화의 텍스트는 참으로 고전적인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으로 관객을 매혹한다.

텍스트 그 자체의 놀라운 확장성과 텍스트 읽기의 적극적 판타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의 전작들처럼 역시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배우들을 배치하는 재능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판타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짧은 등장은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는 측면에서 무척이나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틸다 스윈튼은 모든 소동의 중심에 있는 마담 D. 역할을 위해 80대 노파로 분장을 하고 아주 짧고 강렬하게 등장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빌 머레이와 오웬 윌슨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액자 안에 액자 안에 액자, 라는 식의 겹겹이 액자를 둘러싼 이야기로 전개된다. 현대의 한 소녀가 ‘위대한 작가’의 동상 앞에서 책을 펼치면, 1980년대 카메라 인터뷰를 하는 작가가 등장한다. 이때 그는 1960년대 주브로브카 공화국의 쇠락한 호텔에서 만난 노신사 이야기를 꺼낸다. 노신사가 다시 작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한마디로 설화에 가까운 구전 서사는 우리가 흔히 아는 설화처럼 허무맹랑하지만 역시 흥미진진하다. 아기자기한 색감과 소품은 주브라스카 공화국이라는 비실존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동화적 성격을 강조하지만, 시대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파시즘의 바람이 불던 역사적 시간을 끌어들인다. 강압적인 군인들의 모습으로 시대상을 담아낸다. 또한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화면 비율은 1.37:1, 1.85:1, 2.35:1로 변화하는데, 이것은 각각의 시대를 구별 짓지만 동시에 각 시대에 유행하던 영화 화면비이기도 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사진제공=피터팬픽쳐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비롯해 체크포인트 19 교도소, 제과점 등 화면의 철저한 좌우대칭과 수직·수평을 맞추는 감각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배우들의 동선(달리기를 할 때조차 발맞춰 뛰고, 걸어갈 때의 줄 간격은 거의 강박처럼 보인다)은 웨스 앤더슨 감독이 추구하는 스타일리시한 미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유산을 둘러싼 유쾌한 소동극 속에 역사적 풍자를 담고, 과거를 추억하는 향수에 홀로 남은 자의 쓸쓸한 마음까지 담아내는 이 흥미진진한 모험담은 관객에 따라, 20세기 냉전시대의 유산으로 읽히거나 나치와 파시즘에 대한 풍자로 읽힐 수 있다. 그 만큼 긴박한 시대의 공기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순수 의지로 일관된 한 남자와 로비 보이 사이의 끈끈한 우정과, 순수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그 만큼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로 관객 개개인의 감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극한다.

비정한 시대도 낭만과 웃음으로 넘기면서 지켜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제 고대 유물이 됐지만, 그 속에 남아있는 추억은 제로의 가슴 속에 소중하게 녹아들어 있다. 이미 관객이 울어야 할 포인트까지도 계산해 놓은 명민한 상업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라니, 낡은 책장에서 툭 떨어진 재미있는 고전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도 아련하다.

* 2014년 개봉 당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에서, 15세 관람가로 등급 변경해 지난 11일 재개봉

최재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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