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루비 스팍스’ 포스터/사진제공=세미콜론 스튜디오
영화 ‘루비 스팍스’ 포스터/사진제공=세미콜론 스튜디오
산초 판사에게 기사 돈키호테는 처음 만났던 날부터 영웅이었다. 약간 의심이 가는 대목이 없진 않았지만 시종으로서 나름의 수지타산을 맞춰보니 그랬다는 뜻이다. 이렇게 시작된 둘의 여행 중에 산초 판사가 ‘우리 주인님이 맛이 많이 갔구나’ 하고 생각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돈키호테가 여관을 두고 성이라고 하지 않나, 풍차를 거인으로 여겨 돌진하지 않나, 여관집 여인을 공주로 부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기사도 정신이 수시로 광기와 몽상으로 나타나곤 하니 정신이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충실한 시종으로 주인을 따랐으니 산초 판사의 인간 됨됨이가 남달리 여겨진다.

아무튼 돈키호테의 이상과 현실은 쉼 없이 부딪쳤는데, 놀라운 점은 어떤 고통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기와 숭고한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돈키호테의 진정한 모습은 광기에 있는가, 아니면 그의 진실한 품성에 있는가? 나아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 이상을 무 자르듯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최근 개봉한 ‘루비 스팍스'(Ruby Sparks, 감독 조나단 데이턴·발레리 페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꼭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읽을 때처럼, 이 비슷한 자세로 영화를 보아야 한다. 냉철하고 과학적인 사고로는 자칫 황당한 이야기가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캘빈(폴 다노)은 젊은 소설가다. 그렇지만 이미 큰 성공작을 낸 까닭에 유명작가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데다 재력도 탄탄한 편이다. 하지만 그는 대인관계에 상당히 소극적이다. 게다가 매사에 보수적인 편이라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만나는 사람도 주로 가족에 머물고 아직 손 타자기를 사용해 글을 쓰는 처지다. 그래서 만일 캘빈이 맥락에 맞지 않는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다들 ‘이 친구 여전하네!’ 라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캘빈에게 황당한 일이 터진다.

루비 스팍스(조 카잔)! 난 데 없이 캘빈 앞에 나타난 여자의 이름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온 캘빈은 루비가 부엌에서 태연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에 혼비백산한다. 몇날 며칠 혼돈을 겪다가 형 해리(크리스 메시나)에게 검증을 받고 나서야 그녀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다. 캘빈이 준비 중인 소설의 주인공으로 상정해둔 인물이 실제로 그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그 뒤로 캘빈은 작가들 모임에 루비를 데려가고 가족에게 인사도 시키면서 공식적인 애인관계로 나아가는데 그녀는 완벽하게 적응한다. 하기는 이상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다.

‘루비 스팍스’ 폴 다노, 조 카잔/사진제공=세미콜론 스튜디오
‘루비 스팍스’ 폴 다노, 조 카잔/사진제공=세미콜론 스튜디오
‘루비 스팍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영화다. 이야기 전개도 재미있고 감초처럼 들어가는 재치 넘치는 대사들도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기본은 물론 애정물이다. 다만 남녀 간의 사랑, 아니 좀 더 나아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건네주는 암시가 오히려 중요했다. 결말 예측보다는 메시지가 눈길을 끌었다는 뜻이다.

상대를 존중하여 인격적인 존재로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한 관계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호에 맞춰 상대를 요리하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인간관계 전반에 대해서 꽤 설득력 있는 관찰이었다. 그리고 아네트 베닝, 안토니오 반데라스, 엘리옷 굴드, 스티브 쿠건, 아시프 멘드비 등 쟁쟁한 조연들의 연기도 영화에 힘을 보태주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주인공 역을 했던 어느 배우가 후일담을 털어놓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연극에 몰입하다 보니까 점점 더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꼈고 마침내 연기 도중에 실제로 상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같은 소재로 만든 영화도 있는데 통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소녀 시절 창밖에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구름 속에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나와서 멋지게 2인무를 추고 다시 들어갔다는 지인의 경험을 듣기도 했다. 어디엔가 몰입하면 정신을 끌어당기는 무엇인가 생겨서 그런지 모른다. 내 경우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까지 나누어야 하는 처지라, 자연스럽게 인간은 누구나 한두 가지 이상하고 특별한 경험이 있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종종 사람 겉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때도 있었고 말이다.

현실과 이상(理想), 현실과 상상, 현실과 꿈… 어떤 용어나 각도로 접근해도 우리의 인생은 결국 이상과 상상과 꿈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현실이란 어차피 괴로운 까닭에 그 이상(以上)의 것에 마음을 두기 마련이다. 캘리에게 소설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었지만 오히려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구성된다는 지혜를 얻는다.

루비 스팍스! 좀 별나게 들리지만 귀에 꽂히는 어감을 가진 이름이다. 사실 어느 누구든 맘속에 그런 이름 하나 없으랴!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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