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메이헴’ 포스터
/사진=영화 ‘메이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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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버리고 ‘자기개발’을 이룬 사람들,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그런 유유자적한 삶도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직장을 얻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생존이며 사투다. 얼핏 ‘분노 바이러스’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한 피칠갑 난도질 영화처럼 보이지만 ‘메이헴’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직장인의 비루함과 그런 고단함에 대한 공감이다.

영화의 도입부, 거대 법률회사에 변호사로 취직한 데릭(스티븐 연)이 열정 가득한 신입사원으로 출근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일상이 반복되며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짧고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직장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좋은 직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온갖 더럽고 짜증나고 부패한 일을 처리해주는 곳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부당하게 해고 통보를 받는다.

당시 미국은 눈이 충혈 되면서 분노에 휩싸이게 만드는 분노 바이러스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데, 짐을 싸서 쫓겨나는 순간, 분노 바이러스가 퍼진 건물은 폐쇄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데릭이 일하는 법률회사가 앞서 분노 바이러스로 인한 살인혐의를 무죄로 밝혀냈다는 것이다.

분노 바이러스는 온 빌딩에 퍼지고, 격리된 빌딩 속 직원들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마치 좀비가 된 것처럼 분노에 가득 차 타인을 공격한다. 피칠갑 난도질을 자극적으로 나열하고 있지만 ‘메이헴’이 가진 가장 큰 정서적 장점은 회사라는 공간에서 쌓인 인간관계, 그리고 수직적 상하관계를 상징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영화 속 데릭은 자신의 전용 머그잔이 없어졌다며 계속 찾아 헤맨다. 짐을 싸서 떠나는 순간, 그가 오롯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나쁜 상사에 의해 깨진 그 머그잔밖에 없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모두가 악인은 아니겠지만, 모두가 악인일 수 있는 관계 속에서, 경쟁하고 생존해야 하는 삶 속에서 이미 누군가는 마음 속으로 잔인한 복수를 꿈꾸거나, 스스로에게 칼날을 겨누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메이헴’에는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수직관계가 주는 불안과 공포가 바탕에 깔려 있다. 서열에 따라 높은 곳에 위치한 나쁜 상사들을 한 명씩 처단하려고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전용카드와 암호가 필요한데, 그 코드를 얻기 위한 과정은 ‘큐브’의 생존단계처럼 퍼즐 맞추기의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분노 바이러스가 소멸되는 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주는 속도감이 더한다.

86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에, 조 린치 감독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삶의 고단함에 대한 공감과 나쁜 상사에 대한 복수극이라는 두 가지 정서를 품고 주춤거리지 않고 마구 달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장면도 굳이 개의치 않고, 복수라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간다. 좀비 바이러스를 다룬 미드 ‘위킹 데드’와 ‘옥자’로 국내 팬들에게도 알려진 스티븐 연의 첫 단독 주연작에서 그는 ‘복수’라는 소명을 등에 지고 관객들을 이끈다.

스티븐 연의 조력자이자 영화 속 러브라인을 이끄는 사마라 위빙은 넷플릭스의 ‘사탄의 베이비시터’ 등에 출연했지만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특유의 이죽거리는 표정과 개성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을 주목해 봐도 좋겠다.

‘메이헴’이 보여주는 잔인한 살해와 복수의 장면은 심각하지 않고, 경쾌해서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다. 조 린치 감독은 쉽게 대해지고, 함부로 버려지는 약자들이 언젠가는 내 뒤통수를 내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를 본 직장인들이라면 ‘메이헴’을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직장 상사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메이헴’의 관람을 추천 받은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꼭 ‘반성’하시길.

최재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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