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부부 아우구스토·파울리나 이야기
알츠하이머병도 이겨낸 사랑의 힘…다큐 '이터널 메모리'
사랑하는 사람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걸 바라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이루고 있는 것, 그의 아름다움이 눈앞에서 사라져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그럴수록 더 거세게 타오르는 건지도 모른다.

칠레의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이터널 메모리'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칠레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아우구스토 공고라와 배우인 파울리나 우루티아 부부의 사랑의 기록이다.

아우구스토는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절인 1980년대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권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실상 그대로 보도해 칠레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인권 탄압을 상세하게 기록한 '금지된 기억'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그의 아내 파울리나는 연극뿐 아니라 영화, TV 드라마에서도 이름을 날린 배우로, 칠레의 민주화 이후 문화부 장관에 해당하는 국가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아우구스토가 알츠하이머병 판정을 받은 건 2014년이다.

'이터널 메모리'는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만년의 아우구스토와 그를 돌보는 파울리나의 일상을 조명한다.

아우구스토는 이 영화의 촬영이 끝난 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어느 아침 잠에서 깬 아우구스토에게 파울리나가 인사를 건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우구스토는 "당신은 누구세요? 만나서 반가워요"라고 한다.

아내를 못 알아보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도 이겨낸 사랑의 힘…다큐 '이터널 메모리'
아우구스토의 모든 기억이 깨끗이 사라진 건 아니다.

평생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책에 얼굴을 대고 향기를 빨아들이듯 냄새를 맡는다.

책에서 얻은 지식과 감동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는 듯 "나한테 책은 나 자신이고 친구야. 사라지면 어떡해"라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아우구스토가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을 낱낱이 기록한 건 기억을 말살하려는 권력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는 "기억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아우구스토가 망각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건 비극적이다.

아우구스토를 돌보는 파울리나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파울리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산책하며 그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준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이 부끄럽지 않은 듯 자신의 연극 무대에도 그를 데려간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이 마치 젊은 연인처럼 얼굴을 지그시 맞대고 서 있는 장면과 파울리나가 아우구스토의 주름진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는 장면은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2악장의 선율은 감동을 더한다.

아우구스토와 파울리나의 일상을 조명한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사생활 방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알베르디 감독과 촬영 감독, 음향 기사 등 세 명이 제작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나 밤의 일상은 파울리나가 직접 찍었다.

이 영화는 올해 선댄스영화제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지난 14일 경기도 파주시에서 막을 올린 제15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파울리나는 15일 '이터널 메모리' 시사회에서 "이 영화는 망각이 아닌 기억에 대한 영화"라며 "결국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20일 개봉. 85분. 전체 관람가.

알츠하이머병도 이겨낸 사랑의 힘…다큐 '이터널 메모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