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신영동 유적, 공개…"서울서 드물게 확인되는 유적" 평가
청자 뚜껑으로 쓴 도기 등도 주목…"건물 안전 위해 의도적으로 묻은 듯"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1036년 음력 3월 9일 왕이 삼각산에 가다", "1051년 10월 12일 왕이 삼각산에 가다", "1090년 10월 15일 왕이 태후와 함께 삼각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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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전반을 정리한 역사서 '고려사'(高麗史)에는 삼각산, 즉 지금의 북한산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여러 왕이 수도인 개경을 떠나 삼각산을 찾았고 일정 기간 머무른 뒤 궁으로 돌아갔다.

삼각산 신혈사에 머무를 당시 어떤 노승이 목숨을 살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현종(재위 1009~1031) 이후에는 '삼각산 방문'이 특히 두드러진다.

예종(재위 1105∼1122)은 1110년 태후를 모시고 남경(南京)에 행차하면서 장의사(莊義寺), 승가굴(승가사)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궁을 떠나서 있던 시간이 약 81일이나 된다.

최근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서 발견된 건축 유적은 고려 왕실의 '행차 코스'였던 삼각산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실제로 신라 시기인 659년에 세웠다고 전하는 장의사 터, 보물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로 잘 알려진 승가사 등과 멀지 않은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등이 확인됐다.

고려 왕실이 행차하며 머물렀던 일종의 '별장' 시설일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건 이런 이유에서다.

10일 공개된 신영동 유적 현장에는 왕실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각종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뜻함)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약 1천382㎡ 규모의 조사 현장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네모반듯하게 정비된 건물 흔적이었다.

유적은 크게 동부권역과 서부권역으로 구분돼 있었다.

서부 권역은 외부에서 진입하는 시설을 통과해 전면 6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로 이어진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규모만 해도 길이가 21.5m. 건물을 지었을 때는 이보다 더 컸으리라 추정된다.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이태원 수도문물연구원 연구원은 "서부 권역은 (왕이나 신하 등이) 실제 머물렀던 생활 공간으로 보이며, 동부 권역은 주변 지형을 고려했을 때 삼각산으로 진입하거나 연결되는 공간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길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 등을 봤을 때 당시로서도 건물을 짓는데 공력이 많이 들었을 것"이라며 "당시 기준으로 보면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초 시험적으로 조사에 나섰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유적이 나오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고 연구원 관계자들은 전했다.

서부권역과 동부권역의 중간 지점에서 돌 4개가 발견된 뒤, 조사 범위를 넓혀가자 길게 이어진 석축이 확인됐다.

또 다른 석축에서 '승안 3년'(承安 三年)이라 적힌 기와 조각이 나오자 급히 자문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승안 3년은 중국 금나라 장종(재위 1189∼1208) 때 쓴 것으로, 1198년을 의미한다.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서울에서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이처럼 대규모로 확인된 사례는 처음이다.

박미화 유물관리팀장은 "현재까지 기와 관련 유물이 200∼300점, 자기는 50∼60점 정도 확인됐다"며 "주로 12∼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원형이 깨지거나 온전치 않은 조각이 많은 편이지만 거의 온전한 유물도 있다.

박 팀장은 "도기와 청동판, 유리 장신구, 청자 접시 등은 단차를 두고 만든 건물지 사이에 의도적으로 묻은 유물로 보인다"며 "건물의 안전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도기는 발견 당시 청자 접시로 덮인 상태였는데 엑스레이 촬영 등에서는 뚜렷한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 조각 등과 관련해서는 "남송 시대에 무역 목적으로 자기를 많이 생산했는데, 고려시대 사찰이나 왕실 관련 유적에서 나온 유물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최근 문화재위원회는 전문가 검토 회의를 거쳐 전체 유적과 유구를 현지에서 보존하라고 결정했다.

전문가 회의에서는 "축대, 배수시설, 계단시설 등 고려 중기 공적 위계의 건축 유구 군이 확인됐다"며 "서울 지역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유적으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아직 조사하지 않은 부분은 추가로 발굴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다.

현장에서 1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도기, 토기 조각 등이 확인된 점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이다.

해당 지역은 이른바 '개발 완료 지역'으로 분류돼 그간 조사가 되지 않은 곳으로, 향후 조사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현재 출토 유물을 정리하고 (발견된 지층의) 층위를 구분해서 유적 조성 시기를 명확히 하는 작업 중"이라며 "추가 조사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왕 지나던 길목에 中 도자기까지…'고려 왕실' 흔적 남은 건물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