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들을 수 없는 "전국~노래자랑"…국민 MC 송해, 하늘 무대로 떠나다
“전국~노래자랑!” 실로폰 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하고 유쾌하게 울려 퍼지던 ‘일요일의 남자’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며 국민 여러분 곁에 있겠다”고 했던 국민 MC 송해(본명 송복희) 선생이 8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피란, 아들 잃은 슬픔…무대로 극복하다

경찰과 의료계에 따르면 송해는 이날 오전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영면했다. 관계자는 “식사하러 오실 시간이 지나 인근에 사는 딸이 자택에 가보니 쓰러져 계셨다”고 전했다. 송해는 지난 1월과 5월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3월엔 코로나19에 확진되기도 했다. 건강상 문제로 ‘전국노래자랑’ 하차를 고민했지만, 제작진은 계속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숙박업을 하던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배우며 예술인으로서 꿈을 키웠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24세에 혈혈단신 남한으로 피란왔다. 피란 와중에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해서 ‘바다 해(海)’를 사용해 이름을 새로 지었다.

1955년 유랑극단 ‘창공악극단’에 들어가며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회를 보고 노래도 불렀다. 1960년대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희극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송해의 상징이자 인생 그 자체와도 같은 ‘전국노래자랑’은 1988년 61세에 처음 만났다. 교통사고로 20세 아들을 잃은 뒤 실의에 빠져 있던 때다. 배우 안성기의 친형인 안인기 KBS PD가 방송을 중단한 송해를 다시 무대로 불렀다.

탁월한 소통 능력 가진 ‘최고의 부자’

마이크를 다시 잡은 그는 훨훨 날아다녔다. 34년간 공개 녹화를 진행하며 1000만 명 넘는 사람을 만났다. 지난 4월엔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가 오랫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누구보다 뛰어난 소통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녹화 하루 전에 해당 지역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꼼꼼하게 취재했다. 《나는 딴따라다-송해 평전》을 쓴 오민석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는 “평소엔 근엄하고 카리스마가 대단한 분인데 그 안에 섬세한 다정함을 품고 계셨다”며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나이·성별·직업 무관하게 누구와도 경계를 허물고 깊이 소통했다”고 소개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수많은 상을 받았다.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등을 비롯해 보관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오 교수는 “그분을 보며 대중예술에도 클래식 못지않은 숭고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 회장은 송해를 만나자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왔다”고 했다. 송해는 “나를 무시하나 싶어 발끈했다. 그런데 (정 회장이) ‘사람을 많이 아는 게 최고의 부자’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BMW’가 건강 비결

고인은 기획사, 코디, 로드 매니저 등을 일절 두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소위 ‘BMW’라고 하는 버스(bus)·지하철(metro)·걷기(walk)만 반복했다. 이런 생활 습관은 그의 장수 비결로 꼽힌다.

그가 평전에 남긴 인생 철학은 깊은 울림을 준다.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의미를 모릅니다. 실패했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송해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윤 대통령은 “열정적인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며 “정감 어린 사회로 들었던 우리 이웃의 정겨운 노래와 이야기는 국민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3호실, 발인은 10일이다. 장례는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