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야오고성을 둘러싼 웅장한 모습의 성벽. 수차례 개축을 거친 성벽은 1370년 명나라 때 현재의 모습을 완성했다.
핑야오고성을 둘러싼 웅장한 모습의 성벽. 수차례 개축을 거친 성벽은 1370년 명나라 때 현재의 모습을 완성했다.
중국은 크고 빠르다. 최고 시속 350㎞를 달리는 고속철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은 중국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규모와 속도가 압도하는 시대, 화려한 도시보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마음이 간다. 역사를 간직한 장소라면 더 좋다.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국 산시성 중부에 있는 핑야오(平遙)로 떠나는 이유다. 핑야오는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로, 무려 2700여 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한 고택에서 그윽하게 차 한 잔 즐기다 보면 중국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 든다.

명청시대 건축물 고스란히 남아

한 장의 사진이었다. 핑야오로 향하게 한 주인공은. 시안(西安)의 게스트하우스에 앉아 여행 잡지를 뒤적이고 있을 때, 홍등이 걸린 사진이 눈을 사로잡았다. 대칭형의 건물은 절제미를 품고 있었고,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사진 속 모델은 더 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명청 시대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핑야오고성
명청 시대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핑야오고성
사진 속 장소는 산시성 핑야오고성에 있는 한 객잔이었다. 중국 무협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객잔은 호텔이자 주점으로, 이름에 낭만이 스며 있다. 다행히 객잔이 있는 핑야오는 시안에서 일반 기차로 약 10시간, 고속철로 4~5시간 거리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게다가 핑야오는 명청 시대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는 도시로, 현지인 사이에서는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히는 여행지였다. ‘중국 최고의 건축박물관’ ‘완벽하게 보존된 한족의 계획도시’ 등 핑야오를 수식하는 근사한 문구는 핑야오로 향한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 더욱 낭만적인 모습의 시루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 더욱 낭만적인 모습의 시루
풍선처럼 부푼 호기심을 안고 핑야오 고성에 들어섰다. 견고한 성곽과 우뚝 솟은 시루, 세월의 더께가 쌓인 집은 옛 모습을 품고 있었다. 문을 넘었을 뿐인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들어온 듯 전혀 다른 시대가 펼쳐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핑야오의 역사는 2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800년경 서주 시대 조성된 도시로,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무역과 금융업의 중심지로 활약했다. 청나라가 저물고 중국이 근대화되면서 핑야오는 한때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현대화의 손길이 핑야오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덕분에 핑야오는 ‘옛것은 모두 숙청하라’는 1970년 문화대혁명의 무자비한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핑야오는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곽도시로 인정받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정방형으로 만든 한족의 계획도시

칼로 떠내듯 면발을 잘라 만든 도삭면
칼로 떠내듯 면발을 잘라 만든 도삭면
고성은 마치 살아 있는 박물관 같다. 고풍스러운 거리에 상인과 여행자들이 활기를 내뿜고 있고, 신기한 물건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고성의 여러 볼거리 중 핑야오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웅장한 성벽이다. 서주 시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진흙으로 성을 쌓은 게 시작이다. 이후 수차례 개축했으며, 1370년 명나라 때 벽돌을 이용한 현재의 모습을 완성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지켜준 성은 높이 약 12m, 둘레 6.4㎞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여행자들은 고성의 모습을 한눈에 보기 위해 성벽에 오른다. 명청 시대 생활을 형상화한 조형물은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여의도 다섯 배에 달하는 핑야오성은 하늘에서 보면 거북이처럼 보여 ‘거북성’이라고도 불린다. 성 안에는 문 6개와 보루 72개가 있는데, 문이 6개인 이유는 풍수 영향이다. 동서남북 4개 문에 거북이 머리와 꼬리 부분에 대문을 추가해 모두 6개의 문을 만들었다.

성을 걷다보면, 마치 계획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시처럼 반듯하다. 과거 한족은 정방형으로 성벽을 쌓고 큰 도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었는데, 현존하는 곳 중 핑야오가 과거 계획도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최초의 은행 ‘일승창’

성에서 먼저 돌아볼 공간은 현청사다. 북위 시대 지어진 현청사는 시청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중국의 현청사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건물은 600여 년 전 지은 것으로, 긴 세월 핑야오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현청사와 대칭인 위치에 성황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성황묘가 있다. 유교와 도교, 중국의 여러 문화가 섞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중국 초기 금융기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일승창’
중국 초기 금융기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일승창’
반면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는 단순하고 단아하다. 고즈넉한 문묘를 걸으며, 공자의 사상과 학문을 배우던 옛 모습을 상상한다. 고성을 걷다보면, 우뚝 솟은 누각이 눈을 사로잡는다. 남대가 가운데 있는 고성의 랜드마크로, 고색창연한 핑야오의 멋을 더한다. 특히 밤에는 화사한 조명이 누각을 밝혀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핑야오에서 꼭 들러야 할 유적 중 하나가 중국 은행의 시초인 일승창이다. 지금은 여행자가 주를 이루지만, 과거에는 상인들이 거리를 채웠다. 핑야오가 중국 상업의 중심이 되면서 어음거래가 시작됐고 이에 따라 어음을 교환해 현금화하는 표호(票號)라는 근대 은행이 탄생했다. ‘해 뜨는 것처럼 번창한다’는 뜻의 일승창이 최초의 표호로 등장한 뒤 핑야오는 ‘중국의 월스트리트’로 성장했다. 청나라 때 전국에 51개 표호가 있었는데, 이 중 22개가 핑야오에 본점을 둘 정도였다. 일승창에 가면 중국의 초기 금융기관의 모습과 함께 세계 최초의 어음이 발행된 흔적을 볼 수 있다.

객잔에 앉아 무협영화 속 주인공처럼

핑야오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무작정 성 안을 산책하는 것이다. 회색빛으로 물든 오래된 민가 사이를 걸으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착각에 빠진다. 비슷해 보이는 건물도 자세히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원, 명, 청 시대 건물이 다양하게 성 곳곳에 숨 쉬고 있다. 특히 이른 아침 한적한 길을 산책하면, 어디에선가 옛 사람이 나와 말이라도 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핑야오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다면,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고성 안에는 일반 차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넓은 성을 돌아보기에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방법이 효율적이다.

핑야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객잔에 머무른 시간이다. 예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찬 객잔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밖에서 보면 회색 벽돌을 견고하게 쌓아 만든 건축물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벽에는 홍등이 걸려 있고 가운데 아담하게 정원이 마련돼 있어 운치를 더했다. 오래된 벽돌과 초록의 생생함을 자랑하는 대나무가 묘한 대조를 보여, 풍경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고즈넉하게 차를 한 잔 마시다보니 마음이 가지런해졌다. 방에서는 중국식 침대에 빨간색 꽃무늬가 그려진 이불이 반갑게 맞았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객잔의 풍취는 다음날 아침으로 이어졌다. 맑게 울어대는 새 소리에 눈을 뜨고 나니, 중국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이란 이런 느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도 입도 즐거운 누들로드

핑야오 여행에서 먹는 즐거움을 빠뜨릴 수 없다. 핑야오가 속한 산시성은 누들로드의 발상지로, 신기한 면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무려 면 종류만 해도 280여 가지에 달할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저렴해 일석이조다. 산시성을 대표하는 도삭면은 어깨에 반죽 덩어리를 올리고 칼로 떠내듯 면발을 잘라 만든 면으로 식감이 쫄깃하다. 면은 굵지만, 탄력이 있어 먹는 즐거움이 있다. 고기나 야채 고명 등을 얹어 내고, 맛은 칼국수와 비슷하다. 눈도 즐겁고 입도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요리는 카오라오라오였다. 1400년 전 당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요리로, 동글동글한 모습부터 재미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귀리로 면을 만들었다. 면만 먹으면 슴슴하고, 함께 나온 소스에 찍어 먹어야 맛이 난다.

면뿐만 아니라 핑야오는 소고기 요리로 유명하다. 핑야오의 소고기라는 의미의 ‘핑야오뉴로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날 것처럼 보이지만, 염장한 소고기에 열을 가해 익혀 만들어 맛이 담백하다. 여기에 건강에 좋다고 소문난 식초와 중국의 명주로 꼽히는 펀주(汾酒)를 한 잔 곁들이면, 핑야오 여행이 더 풍성해진다.

핑야오=글·사진 채지형 여행작가 travelguru@naver.com

여행정보

핑야오 고성 입장은 무료지만 내부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는 입장권이 필요하다. 통합 입장권이 유리하며, 3일 동안 22곳의 유적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과 여행한다면 전기차를 이용해 성 안을 돌아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추운 계절에 여행한다면 마스크를 챙기는 것이 좋다.

핑야오는 쇼핑 천국이다. 전통을 자랑하는 핑야오의 칠기제품을 비롯해 알록달록 수놓은 손거울, 꽃 자수가 놓인 중국풍 신발 등 지갑을 열게 하는 기념품이 가득하다.

핑야오 주변 여행지로는 청나라 상인 교씨네 저택인 차오자다위안(喬家大院)과 중국의 웅장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산(綿山)이 있다. 차오자다위안은 세계적인 감독 장이머우의 영화 ‘홍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며, 화려한 건축미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