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카즈베기
스테판츠민다로 가는 길
카즈베기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약 15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카즈베기의 본래 명칭은 조지아 정교의 수도사였던 스테판 이름에서 유래한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다. 그러나 여전히 소련 연방 시절 불렸던 러시아식 명칭인 카즈베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기 위해 조지아에서부터 러시아까지 뻗어있는 군용도로를 따라 달린다. 한때는 실크로드에 한 부분이었던 이 길은 제정 러시아 시절 조지아를 합병하기 위한 군사 목적으로 도로를 확장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13세기 지어진 아나누리(Ananuri) 성채와 에메랄드빛의 진발리(Zhinvali) 호수를 지나면 코카서스의 험준한 산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를 따라 창밖 풍경도 점점 극적으로 변모한다. 그간 멀리서만 바라보던 코카서스 산맥과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만큼이나 풍광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의 손놀림도 분주해진다. 해발고도 2000m에 육박하는 대 코카서스 산맥(Greater Caucasus Range)을 지나는 즈바리 패스(Jvari Pass)로 들어서자 풍광은 더욱 장엄해진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하나하나 돌 때마다 눈앞에는 상상치 못한 비경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즈바리 패스의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있는 구다우리(Gudauri)에 잠시 정차를 한다.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스키 리조트 중 하나인 이곳은 패러글라이딩, 헬리스키 등을 즐길 수 있는 겨울 스포츠의 성지로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딱히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들려야 할 이유는 있다. 절벽 위에 세워진 조지아 러시아 친선 기념비를 찾기 위함이다. 1931년 건설된 반원형 모양의 기념비 내부는 조지아와 러시아의 역사를 담은 모자이크 벽화로 채워져 있다. 기념비 자체도 볼거리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파노라마 전망은 더욱더 훌륭하다.
신과 인간, 그 사이에 지어진 성당
구다우리에서 40여 분을 더 달려 스테판츠민다 마을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자 설산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아담한 중앙 광장에는 트레킹을 끝내고 온 세계 각지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카즈벡 해발 2000m 산등성이 삼위일체 성당이 미소 짓고 있네
인간에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가 잠들었던 이곳
상기된 그들의 볼과 흙투성이 부츠를 보니 아웃도어 마니아들의 성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다. 인구 1500명이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마을의 골목 골목은 마치 우리네 시골에서나 볼법한 정겨운 풍경으로 꾹꾹 채워져 있다. 꼬리를 펄럭거리며 골목 하나를 장악한 소떼를 지나 예약해 둔 숙소에 들어선다. 트레커들의 빨래가 주렁주렁 널린 마당을 지나 2층 객실로 향한다. 작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방으로 들어서자 네모난 창 너머로 스테판츠민다의 상징 카즈벡 산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높이 5047m, 조지아와 러시아에 넓게 걸쳐진 휴화산 카즈벡은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자 코카서스 산맥에서는 7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카즈벡은 조지아어로 ‘빙하 봉(Glacier Peak)’ 혹은 ‘몹시 추운 봉우리(Freezing Cold Peak)’라는 뜻을 지녔는데, 이름처럼 봉우리의 끝은 언제나 하얀 만년설로 뒤덮여있다. 신비로운 자태만큼이나 산에 얽힌 신화 또한 흥미롭다. 코카서스는 수많은 고대 전설과 이야기가 얽힌 신화의 무대다. 카즈벡은 그중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과 기술을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왕 제우스의 미움을 사게 된다. 그 죄로 인해 프로메테우스는 암벽에 결박당한 채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 산이 바로 카즈벡 산이다. 정확히는 베틀레미(Betlemi) 동굴이 위치한 해발고도 4000m 절벽에 그가 묶였었다고 전해진다.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카즈베기 마을 전경
카즈벡 산 중턱에는 날카로운 고봉들만큼이나 강한 존재감을 뽐내는 것 하나가 있다. 바로 게르게티 성 삼위일체 성당(Gergeti Trinity Church)이다. 조지아어로 츠민다 사메바(Tsminda Sameba)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카즈베기를 오는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들려야 하는 마을의 랜드마크다. 2018년 말에 해발 2170m 높이에 있는 성당까지 포장도로가 깔리면서 일반 차량도 접근이 가능해 졌지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발로 직접 걸어 오르는 것이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르며 점점 가까워지는 게르게티 성당의 자태를 보는 행운은 땀을 흘리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다. 테렉(Terek) 강을 지나 게르게티 마을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지나고 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경사가 아주 가파른 탓에 숨이 금세 턱 끝까지 차오른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산길을 한 시간 반쯤 올랐을까. 어느새 눈앞에는 푸른 언덕 위에 우직하게 서 있는 성당의 고풍스러운 자태가 보인다. 14세기에 건립된 이 성당은 조지아 케비(Khevy) 지방에서 교차식 돔 지붕 형식을 띠는 유일한 종교 건축물이다. 본당을 포함해 종탑, 성직자들이 거주하던 건물들로 구성된 작은 복합단지를 이루고 있다.
워낙 높고 험준한 산세에 자리한 덕분에, 국가 재난 시 성 니노의 십자가를 비롯한 조지아 정교의 주요 성물들을 므츠헤타(Mtskheta)로부터 피신시키는 성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종교적 중요성도 크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물의 아름다운 조화다. 한쪽을 바라보면 하늘 높이 솟은 카즈벡 산이 코앞에 펼쳐지고, 또 다른 한쪽에는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카즈베기 마을들의 전경이 품 안에 들어온다. 하늘과 인간의 중간, 그 신화 속 장소에 우뚝 선 게르게티의 모습은 한참을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다. 코카서스의 낭만을 걷다 카즈베기에서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을 꼽자면 그것은 ‘걷는 일’이 될 것이다. 트레킹, 클라이밍, 사이클링, 홀스백 라이딩 등 아웃도어 스포츠의 메카로 여겨지는 곳답게 수많은 트레킹·하이킹 코스가 마련돼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타(Juta)와 트루소 밸리(Truso) 밸리 트레킹이다. 코카서스의 때 묻지 않은 속살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 난이도도 비교적 낮은 데다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모습을 즐기는 트레킹 코스 일품
아침 일찍 일어나 지역에서 가장 높은 마을 중 하나인 주타로 향한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달리면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마을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트레킹 시작이다. 입구에는 별다른 이정표가 마련돼 있지 않아 지도 앱(응용프로그램)과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길을 찾는다. 초반 30분가량 이어지는 오르막을 지나면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거대한 차우키 매시프(Chaukhi massif)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주타 트레킹은 차우키 매시프를 목적으로 두고 광활한 계곡 사이를 자유롭게 거니는 일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커지는 빙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코카서스의 매력을 마음껏 즐긴다. 이슬이 맺힌 풀잎,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빙하 계곡, 바람에 살랑대는 들꽃, 지난겨울이 두고 간 설원까지,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을 원 없이 살펴보고 담는다.
사람들은 종종 조지아를 ‘작은 스위스’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주타에서 만난 풍경들은 세계 각지에서 트레킹을 하며 만난 풍경 중 가장 크고 순수한 감동을 안겨주었으니까. 주타 트레킹이라 하면 보통 주타 마을에서 차우키 패스(Chaukhi Pass)를 따라 로쉬카 트렉(Roshka Trek)까지 걷는 약 18㎞의 길을 일컫는다. 그러나 시간이 넉넉지 않은 여행객은 보통 3㎞ 지점에 있는 차우키 호수까지 갔다가 원점으로 회귀하는 트레킹 코스를 택한다. 넉넉잡아 왕복 6시간 정도가 걸리는 코스로 주타의 알짜배기를 쏙쏙 골라 즐길 수 있다. 코스 완주가 목표였지만 거대한 눈밭이 길을 가로막아 더 이상의 트레킹이 불가능해진 상황이 발생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차우키 호수로 돌아가 예상치 못한 여유를 한껏 즐긴다. 모든 선택에는 저마다의 즐거움이 있음을 주타 트레킹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스테판츠민다 마을로 돌아가기 전, 코스 초입에 있는 피브스 시즌(5th season)캠핑장에 잠시 들리기로 한다. 마당에 놓인 알록달록한 해먹 위에 누워 맥주 한 잔과 함께 주타의 마지막 모습을 감상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극찬했던 코카서스의 낭만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갈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풍경이다. 마을로 돌아온 후 노곤해진 몸을 달래기 위해 룸스 호텔(Rooms Hotel)로 향한다.
카즈베기의 유일무이한 고급호텔인데, 테라스에서 보는 전경이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조지아의 물가치곤 숙박료가 매우 비싼 편이지만 굳이 숙박하지 않더라도 테라스를 드나드는 것은 자유다. 간단하게 식사를 할 겸 테라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음식과 와인을 주문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구름과 안개가 머물고 떠나는 카즈벡 산 위로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군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검게 변한 코카서스의 산맥 사이로 게르게티 성당이 촛불처럼 환하게 제 몸을 밝힌다. 언젠가 다시 꼭 이곳에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카즈베기에서의 꿈같은 밤을 보낸다.
조지아=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inst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