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도 항리마을의 소떼
가거도 항리마을의 소떼
가게 산 무너져 평지나 되라
강물이나 몰라져서 육로나 되라
백년을 살자고 기약한 그 사람
금년도 못 살고 이별이 들었네
가거도라 앞 강에 일중선이 뜨고
정든 님 술잔에 잔 버끔 떴네
오는 새 가는 새 듬불 속에서 놀고
임재 없는 이내 몸은 어데로 갈지 모린다

-가거도 산다이 중에서


오랜 항해 끝에 여객선은 가거도항에 입항한다. 가거도항 입구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신비롭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작은 바위 섬인 녹섬, 작은 녹섬과 연이어 늘어선 회룡산 기암괴석들 때문이다. 섬 살이가 신산해 유난히도 전승 민요가 많은 섬. 머나먼 바다에 홀로 우뚝 선 낙도다 보니 육지 한 번 나가기가 외국 가기만큼 어려웠다. 옛날에는 평생 섬을 떠나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하직한 사람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한국 최서남단 가거도. 오죽 육지가 그리웠으면 가게산(독실산)이 무너져 바다를 메워 육지까지 길이 생기게 해 달라고 노래를 불렀을까.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졌다지만 쾌속의 여객선으로도 아직 네 시간 반이나 걸리는 섬. 섬살이의 고달픔은 여전하지만 내륙의 여행자들에게 가거도는 평생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인생 섬’, 버킷 리스트에 담고 싶은 섬이다.
가거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열기와 우럭
가거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열기와 우럭
소흑산도였던 가거도 중국에 더 가까워

[여행의 향기] 뭍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먼 바다 '외딴 섬'
가거도에서는 중국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진담처럼 들린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섬답게 가거도항의 이정표도 국제적이다. 중국 390㎞, 필리핀 2180㎞, 서울 420㎞. 서울보다 오히려 중국이 가깝다. 과거에도 가거도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사이를 비스듬히 건너는 황해 사단(斜斷) 항로에 있어 외국 배들이 수시로 거쳐 가던 섬이었다.

중국 송나라 때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정세보고서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가거도에 대한 기록이 엿보인다. 서긍을 비롯한 사신단 200여 명은 8척의 선단과 함께 송나라 황제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를 방문했다. 1123년 5월28일 송나라 영파를 출발한 서긍은 6월2일 협계산을 지났다. 서긍은 협계산을 중국과 고려의 경계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협계산이 바로 가거도다. 가거도는 일제에 의해 소흑산도라 이름 붙여졌으나 해방 이후에야 본 이름을 되찾았다. 본래는 가거도가 아니라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는데 일제가 편의상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부른 것이다.

가거도는 서남해의 어업 전진기지로 어부들에게는 친숙한 섬이지만 뭍의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화와 방송 등을 통해 소개된 뒤 방문객이 늘어났으나 워낙 뱃길이 험해 여전히 뭍에서 멀기만 하다. 가거도에는 대리, 항리, 대풍마을 등 세 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대부분 주민은 큰 마을인 대리에 모여 산다. 이 마을에 식당과 여관 등 편의시설과 행정기관까지 있어 마치 해상 도시를 방불케 한다. 가거도의 대표적인 트레일인 독실산 등산로는 대리마을 김부련 하늘 길부터 시작된다. 김부련 열사는 가거도 출신으로 4·19 혁명 때 서라벌예고 재학 중 혁명에 참가했다가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가거도 출장소 앞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뒷산 능선까지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40분 정도가 오르막이다. 능선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내내 평탄하다. 두 시간 반이면 독실산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독실산은 조금 실망스럽다. 군부대가 있어 자동차로도 정상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상 역시 숲에 가로막혀 허탈한 느낌을 준다.

섬둥반도, ‘극락도 살인사건’ 촬영지

가거도 최고의 절경은 항리 마을의 섬둥반도다. 항리 초입 섬둥반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그 감동적인 풍경 앞에 넋을 잃을 정도다. 달력에 나올 법한 풍경이 두 눈으로 쑥 들어온다. 항리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비탈에 위태롭게 붙어 있다. 섬둥반도는 ‘극락도 살인사건’이란 영화와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로 유명해졌는데 오르는 능선 길에 데크가 깔린 것이 조금 아쉬울 뿐 원형은 잘 보존돼 있다. 한없이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처럼 섬둥반도는 역동적이다. 그 끝을 따라가면 중국이다. 최서남단 섬인 가거도에서도 서쪽 끝인 섬둥반도는 한국에서 가장 해가 늦게 지는 곳이기도 하다. 가거도 여행에서 또 하나 놓치면 안 되는 절경은 해상에 있다. 일정한 인원이 모이면 가거도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 운항하는데 기암괴석의 절경은 중국의 계림에 못지않게 신비롭다. 가거도 백년 등대 또한 육로보다 해로를 따라가는 길이 더욱 아름답다.
가거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항리마을의 섬둥반도
가거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항리마을의 섬둥반도
겨울철 북서풍이 불면 가거도 앞 바다에는 시커먼 중국 어선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데 해경이 항만 안에는 못 들어오게 단속한다. 중국 어선들은 하나같이 검거나 회색 칠을 하고 있어 떼거리로 몰려들면 정말 무섭다. 폭풍주의보가 해제되고 바다가 잠잠해져도 중국 배들은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않는다.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해경이 더러 물대포를 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무용하다. 버틸 수 있는 극한까지 버틴다. 이따금 중국 배들 간에 충돌이 있으면 우리 해경이 말려보지만 이 또한 무망하다. 대리마을에서 만난 고깃배 선장은 가거도 근해 어장으로 중국 배가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어릴 때인 45년 전부터라고 증언한다.

중국 어선, 싹쓸이 어업으로 피해 보기도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중국 어선들이 항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환자가 생기거나 선박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치료하고 수리해준 뒤 다시 내보낸다. 복어를 먹고 중독된 사람들이 그중 많다. 이들 또한 보건소에서 치료한 뒤 돌려보낸다. 공해상에서 중국 배를 만나면 위험하다. 해적으로 돌변하기 일쑤다. 어구들이나 식량 같은 것을 강탈해 가기도 한다. 예전에는 해경이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됐다. 해경 배가 작아서 실질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해 질 녘 가거도 풍경
해 질 녘 가거도 풍경
하지만 이제는 해경 단속선도 규모가 커지고 수도 많아져 주기적으로 단속에 나서니 중국 어선들의 해적질은 줄었다. 예전에는 또 여수, 통영, 삼천포 쪽 고대구리배(저인망 어선)들이 몰려와 치어까지 마구 잡아들여 어장에 물고기의 씨가 마른 적도 있었다. 고대구리 조업이 금지되면서 조기 어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가거도 인근 바다에서도 제법 많은 조기가 잡힌다. 연안의 섬들에서는 고대구리배가 사라진 뒤 바닷속을 긁어주지 않아 물고기가 안 잡힌다고 주장하는 어부가 많았는데 여기서는 또 다른 진단을 한다. 면밀한 조사가 있어야 하지 싶다.
	                        소형 목선에서 작업 중인 어부
소형 목선에서 작업 중인 어부
요즘 가거도 어민들은 상심이 크다. 최근 가거도 주변 바다에 대한 어업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가거도 주변 바다는 외지에서 온 수십, 수백t짜리 대형 근해 어선들이 수산물을 싹쓸이해 갔다. 대부분 소형 어선으로 조업하는 가거도 어민들은 대형 외지 어선들의 싹쓸이 어업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봤다.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거도 어민들은 자기 바다의 어장권을 보호받기 위해 탄원해 2010년 가거도 인근 해역 70.63㎢를 수산자원 관리 수면으로 지정받았다. 관리 수면에선 허가받은 연안어선이나 잠수기 어선 외에는 조업할 수 없다. 이 덕분에 가거도 어민들은 한동안 어업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5년까지 잠깐뿐이었다. 외지 대형 근해 어선 선주들의 압력으로 관리 수면 지정이 해제되고 말았다. 다시 가거도 주변 해역은 가거도 어선이 아니라 외지에서 온 대형 근해 어선들의 주 무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가거도 바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업 면허는 어선 크기에 따라 육지에서 가까운 바다에서만 조업이 가능한 연안어업, 먼 바다에서만 가능한 근해어업, 원양에서만 가능한 원양어업으로 나뉜다. 연안어업 면허를 만든 것은 영세한 어민들을 대형 선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1997년까지만 해도 바다에 연안과 근해가 선명히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연안 어장까지 넘보는 탐욕스러운 대형 선단 선주들 로비에 의해 점차 연근해가 통폐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연안 어장에 어족자원의 씨가 마르고 있다. 또 중형 쌍끌이 어선과 어구가 엉켜 연안 어선이 뒤집히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르고 있어 연안 어민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일도 적지 않다. 내륙이나 바다나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무법천지였던 섬, 이제는 평화로운 섬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거도는 풍랑주의보가 내려 어선들이 피항을 오면 파시처럼 흥청거렸다. 한 번에 보통 100~150척의 어선이 들어왔고 그중 200~300명이 대리항을 휘젓고 다녔다. 어선들은 풍랑을 피하거나 식고미(식자재) 등을 조달하기 위해 가거도항에 입항했다. 당시 대리에는 약속, 오씽, 나도나, 이슬비 등 일곱 곳의 색싯집이 있었다. 한 집당 아가씨가 보통 4~5명씩 있었고 술도 따르고 2차까지 나갔다. 밥을 하는 화장같이 서열 낮은 선원들은 배에서 내리지도 못했고 색싯집은 선주, 선장 같은 사람들이나 갈 수 있었다. 갑판장, 기관장급 중간 간부들에게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술집, 식당, 여관, 노래방은 물론이고 구멍가게까지 큰돈을 벌었다. 선원들끼리 칼부림도 예사였다. 완전 무법천지였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가거도는 한산하다. 더 이상 가거도에 외지 어선들이 피항 오지 않기 때문이다.

호황을 누리던 가거도가 된서리를 맞은 것은 성매매 단속반이 뜨면서부터였다. 2000년대 초반 정부가 미아리 등의 집창촌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면서 그 여파가 가거도까지 밀려온 것이다. 단속반이 뜬다는 소식이 들리자 몇몇 업주는 배에 아가씨들을 싣고 도망가다가 잡혔다. 그 후 가거도에서 아가씨 있는 술집은 완전히 사라졌다. 누군가 다시 데려다 놓으면 바로 신고가 들어갔다. 색싯집이 사라지자 가거도로 들어오던 어선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선들은 풍랑을 피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술과 여자를 찾아 들어온 것이다. 그 후 대부분 어선은 유흥업소가 있는 내륙으로 갔다. 선창가 여관 주인은 “여자가 있어야 배가 들어온다”고 단언했다. “뱃사람들은 돈 생각을 안 해요”라며 웃는다. 이 덕분에 가거도 선창가 경기는 죽었지만 섬은 한결 평화로워졌다. 선원들끼리의 그 무서웠던 칼부림도 사라졌고 부부싸움도 줄었다. 가거도 남자들도 오지에서 손님이 오면 손님 핑계로 색싯집이나 노래방을 드나들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니 집안의 평화가 온 것이다. 사람살이의 본질은 도심 한복판이나 낙도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강제윤 시인은…

[여행의 향기] 뭍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먼 바다 '외딴 섬'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