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지만 실용적인 '단순함의 미학'
식당 의자·매장 간판·교회까지 '디자인 교과서'

핀란드 디자인에 관한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여행이 더 풍요로워진다.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는 알바르 알토(Alvar Aalto)다. 그를 보면 핀란드가 얼마나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 디자인의 선구자로 불리는 알토는 현지에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유로화를 쓰기 전에 사용된 핀란드 지폐에는 알토의 인물화가 들어가 있었을 정도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했고 이를 디자인적 가치로 연결했다. 알토가 디자인한 가장 유명한 제품은 사보이 꽃병(Savoy vase)이다. 핀란드의 굴곡진 호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핀란드의 건축과 디자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그의 철학은 후대 디자이너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헬싱키 디자인 지구에서 북쪽으로 7㎞ 떨어진 이딸라&아라비아디자인센터(Iittala & Arabia Design Center)는 핀란드의 또 다른 디자인 명소다.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인 이딸라(Iittala)와 아라비아(Arabia)의 과거와 현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딸라는 식기, 인테리어 소품, 유리 공예품 등의 제품을 선보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사명은 1881년에 유리공장이 설립된 핀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 이딸라에서 유래됐다. 이딸라의 유명 제품 중에는 크리스털 잔이 있다. 밑바닥이 불규칙한 모양인데 얼음으로 뒤덮인 핀란드의 자연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디자인에 평생 사용할 수 있는 내구성 때문에 이딸라 제품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1873년에 공장을 설립한 아라비아는 핀란드가 자랑하는 또 다른 일류 브랜드다. 스칸디나비아를 대표하는 도자기 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같은 건물에는 피스카스 파빌리온(Fiskars pavillion)이 있다. 오렌지 손잡이 가위가 대표작인 피스카스그룹의 도끼, 가위, 삽 등 공구를 예술적으로 구성한 공간이다. 일상에서 쓰는 도구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변모한 전시장을 보니 그 기발한 착상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신의 은총이 쏟아지는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언젠가 ‘세계의 특별한 건축물’을 주제로 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진 중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것은 한 교회였다. 교회라고 하기에는 너무 몽환적인 느낌이어서 예술작품으로 오해했을 정도였다.

교회에 들어서면 어디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내부구조가 정신을 멍하게 만든다. 웅장한 지붕은 돔 형태로 지름이 24m에 이른다. 22㎞ 길이의 구리 띠를 말아서 만든 돔 아래에는 180개의 창문이 있다. 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빛이 천천히 이동하는데 시시각각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공적인 빛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장면이다.
교회 내부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벽은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뤄져 있는데 말끔하게 깎아내지 않고 자연적인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불규칙적인 암석의 표면은 그 자체가 훌륭한 인테리어다. 화려함보다 절제의 미학을 추구하는 핀란드 디자인의 정신이 이곳에도 투영된 것 같다.
이 교회는 처음 설계할 때부터 음향 전문가가 참여했고 연간 200회 이상의 음악회가 열린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 작은 음악회가 한창이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미사를 올리듯 조용히 곡을 듣거나 기도를 했다. 제단에서 장엄한 곡을 연주하는 음악가의 머리 위에는 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마저 절로 기도하고 싶은 경건한 느낌은 바쁜 여행객의 마음을 평화롭게 어루만졌다. 입장료는 1인 3유로.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교차 현대미술관
헬싱키 시청사에서 1.2㎞ 떨어진 키아스마 현대미술관에서도 디자인의 힘을 체감할 수 있다. ‘염색체의 교차’를 뜻하는 키아스마는 미국 최고 건축가로 꼽히는 스티븐 홀이 설계했다. 독특한 외관 때문에 1998년 공개 당시엔 논란이 됐으나, 지금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건물은 사각형이 아니라 삼각형 모양의 대지에 지어졌다. 이 때문에 미술관 내부는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흰색의 벽과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보인다. 각 층은 계단 대신 완만한 곡선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며 정적인 공간을 생동감 넘치게 만든다. 이런 키아스마의 내부구조는 관람객을 현대미술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한다. 키아스마에서는 주제별 전시회 및 박물관 건축에 관해 설명하는 가이드투어를 진행한다. 영어 해설은 매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한다. 예약을 원하면 메일로 문의하면 된다. 월요일은 개장하지 않는다.
트롤을 소재로 한 귀여운 무민
미국에 미키마우스가 있다면 핀란드엔 무민(Moomin)이 있다. 핀란드가 탄생시킨 인기 캐릭터 무민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 괴물 ‘트롤’을 소재로 했다. 1945년 토베 얀손이 《무민 가족과 대홍수》라는 책을 통해 처음 선보였고, 지금은 세계가 사랑하는 스타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카페에서 무민 모양의 빵이나 케이크를 팔지 않는 것이 좀 이상했다. 혹시 라이선스 문제가 걸린 게 아닐까 싶어 물어봤다. 점장은 “무민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모양을 본뜬 빵을 파헤치는 것까지 원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굳이 귀여운 무민 모양의 빵을 포크로 헤집으며 먹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만큼 무민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아닐까. 카페에 놓인 방명록에는 세계에서 온 무민 팬들이 남긴 메시지가 남아 있다. 원작 뺨치는 그림 실력을 발휘한 것도 있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헬싱키에는 총 5개의 무민카페가 있다. 무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여행정보
핀에어는 서울에서 핀란드로 가는 가장 편리한 스케줄을 제공한다. 인천~헬싱키 노선을 주 7회 직항으로 운항 중이며 비행시간은 약 9시간이다. 지난해 도입한 최신형 A350 기종을 투입 중이다. A350은 에어 필터링 시스템, 구역별 온도 조절, 낮은 기내 압력 등을 통해 편안한 여행을 돕는다. 핀란드에선 유로를 사용하며, 관광 목적의 경우 90일까지 비자 없이 머물 수 있다. 헬싱키 날씨는 여름 한낮 평균기온이 21도 수준이다. 일교차가 심해 안에는 얇게 입어도 겉옷을 갖고 다니는 것이 좋다. 10월에는 서울의 초겨울 날씨와 비슷하므로 따뜻한 점퍼나 니트류가 필수다.
핀란드 여행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헬싱키=글·사진 김명상 여행작가 terry@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