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기념관은 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호주가 참여한 전 세계 전쟁에 관한 기록과 무기, 비행기가 전시돼 있다. 중국과 남중국해 다툼이 있기는 하지만 거대 열강 틈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호주는 참 다양한 세계 전쟁에 참여했다. 6·25전쟁에 참여한 전시 패널도 있었다. 기념관 안쪽 중앙에는 연못이 있고, 양쪽 회랑을 따라 각국 전쟁터에서 전사한 호주 병사들의 이름이 동판에 적혀 있다. 동판에는 관광객이 추모의 의미로 촘촘하게 꽂아 놓은 빨간 양귀비꽃이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었다. 마치 죽은 병사들이 하나하나의 꽃으로 되살아나 그곳에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판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갈리폴리’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1915년 5월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 갈리폴리에서 영국과 함께 싸우다 거의 전멸한 호주군 병사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다.
도시 자체가 유령의 집처럼 텅 빈 것 같은 캔버라를 거쳐 다시 며칠을 밤낮으로 운전해서 마침내 멜버른에 도착했다. 멜버른은 건물도 카페도 모두 독창적이다. 성 패트릭 성당과 피츠로이 정원처럼 빅토리아풍의 경건하고 고전적인 건물도 있고, 아트 센터처럼 모던한 디자인의 건물이 수두룩했다. 뒷골목을 걷다 보면 수없이 빼곡하게 벽을 채우고 있는 그라피티가 역동성을 더하고,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거리에는 골동품의 진중함이 풍겨난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말 그대로 위엄 있고 아름다웠다. 제법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이 풍광을 눈과 가슴에 담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바다는 물론 해변가에는 사암으로 이뤄진 기암괴석이 줄줄이 서 있다. 금색, 회색, 노란색, 황토색, 석양의 자주색, 파도의 흰색과 하늘의 푸른색, 모든 색이 밀려 들어왔다. 풍경이 초현실적이라 마치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천천히 바닷가를 산책했다. 파도가 끊임없이 사암들을 부식시키며 돌 위에 자신의 입김을 조각하고 바위의 살들은 그런 파도에 순응하여 조금씩 제 몸을 깎아내고 있었다. 사암은 모래 암석이라 파도에 쉽게 부서진다고 한다. 런던 브리지 2개 중 하나도 폭우에 허물어져 버렸고, 12사도 봉우리도 이제 3개 남았다. 그러나 아직도 곳곳에 작은 동굴이 숨어 있고 그 해변가 사이로 사람들은 유유히 수영하면서 여름을 즐긴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즉흥적으로 선택한 여행이라 생각 없이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다시 비행기를 타거나 자가용으로 돌아가거나. 그러나 그 긴 길을 다시 차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마지막 날 한국에 비해 턱없이 싼 쇠고기 스테이크를 마트에서 사서 구워 먹으며, 아웃백 스테이크란 이런 거라며 마음을 달랬다. 한국 면적의 76배. 외로움이 더 깊어지면 이번에는 가도 가도 사람의 흔적이 끊어져 있는 깊은 사막, 진정한 호주의 오지(아웃백)로 들어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레이트 다운 언더. 호주 여행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