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시기마다 각각 다른 호를 사용한 정약용(왼쪽)과 선비를 꿈꾸며 중국 명나라 사대부 화가의 호를 쓴 김홍도(오른쪽). 다산초당 제공
인생의 시기마다 각각 다른 호를 사용한 정약용(왼쪽)과 선비를 꿈꾸며 중국 명나라 사대부 화가의 호를 쓴 김홍도(오른쪽). 다산초당 제공
조선 선비들은 적어도 셋 이상의 이름으로 불렸다. 부모와 스승이 부르는 이름, 처음 만나는 이에게 소개하는 이름, 친한 친구들끼리 부르는 이름이 각각 달랐다. 이 ‘이름’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태어날 때 부모가 붙여주는 ‘명(名)’, 성인이 된 뒤 윗사람이 붙여주는 ‘자(字)’, 자신이 직접 지어 부르는 ‘호(號)’다.

이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이름은 호다. 명과 자는 부모와 스승이 지어주므로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호는 자신이 마음대로 지어서 불렀다. 시기마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호를 지어 이름 대신 쓰기도 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호로 불린 이유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호를 지었을까.

[책마을] 다산·여유당·사암…12개 호 통해 일대기 표현한 정약용
역사평론가이자 고전연구가인 저자는《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에서 삼봉 정도전부터 추사 김정희까지 조선시대 다양한 인물의 호를 분석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는 “호는 자신의 생각과 사상, 의지를 담은 개성적인 삶의 지표”라며 “호에 담긴 뜻을 분석하면 그 인물의 삶과 당대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호를 짓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명이나 사물에서 따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지명을 딴 ‘율곡(栗谷)’ 이이, ‘연암(燕巖)’ 박지원, ‘송강(松江)’ 정철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지향하는 뜻이나 본받고자 하는 인물에서 호를 찾아 평생의 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고려시대 후기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호 ‘회헌(晦軒)’은 성리학의 사상적 뿌리인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왔다. 권율 장군은 늙어서도 삶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 만년에 푸름을 발산하겠다는 의미의 ‘만취당(晩翠堂)’이란 호를 지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나 ‘단원(檀園)’ 김홍도처럼 취향을 호로 나타내기도 했다. 돌 깎는 것을 좋아해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석치(石痴)’를 호로 쓴 정철조 등 재미있고 자유분방한 호를 쓴 사람도 있다.

정약용은 호를 만드는 다양한 방법과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다산 열수 여유당 삼미자 탁옹 사암 등 평생에 걸쳐 쓴 호가 12개가량 된다.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정약용의 일대기를 훑을 수 있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신 다산(茶山)은 한강을 뜻하는 열수(洌水) 근처에서 태어났다. 천연두를 앓은 흉터로 눈썹이 세 마디로 나뉘었지만 부끄러워하는 대신 자신을 스스로 삼미자(三尾子)라 부를 정도로 당찬 젊은이였다. ‘여(與)’ ‘유(猶)’자가 들어가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대로 신중하게 살려고 했다. 장년기에는 정치적 탄압에 유배지를 전전해 뜻을 펼치지 못했다. 스스로 대나무 껍질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탁옹(翁)이라 부른 것이 이때의 비애를 드러낸다.

하지만 정약용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를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60세 때 직접 쓴 자신의 묘지 소개 글에서 호로 소개한 사암(俟菴)은 ‘초막에서 기다리다’라는 뜻. 자신이 꿈꿨던 사회를 만든 다음 세대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이었다.

책은 인물들이 자신의 호에 관해 설명하는 산문이나 시도 함께 실었다. 고전연구가인 저자가 한문을 번역하고 해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다. 깊은 고민 끝에 각자의 정체성을 대변하기 위해 지은 호에서 선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