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드라마 세트장 내부의 달동네세트장. 한국관광공사 제공
순천 드라마 세트장 내부의 달동네세트장. 한국관광공사 제공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가라앉을 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론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다. 휴일에 한 번쯤 요즘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현장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세대별로 다른 경험의 격차도 좁히고,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회가 되는 곳으로 가보자.

◆추억은 방울방울… 순천 드라마 세트장

순천 드라마 세트장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에덴의 동쪽’을 비롯해 영화 ‘강남 1970’ ‘늑대소년’ ‘님은 먼 곳에’ 등을 촬영한 곳이다. 화려한 면면을 자랑하는 작품들이 많은 데 이곳저곳을 누비다 보면 진짜 옛날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든다.

4만㎡ 규모로 지은 세트장은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뉜다. 1960~1980년대 순천 읍내거리를 재현한 소도읍 세트장, 1960년대 가난한 삶의 현장을 가져다 놓은 듯한 달동네 세트장, 1980년대 서울 변두리의 번화가를 보여주는 변두리 세트장 등으로 구성됐다. 곳곳의 건물들은 소품 하나까지 잘 갖춰 놓아서 옛시절의 생활상이 더욱 생생하다. 옛 건물을 그대로 재현한 면사무소 건물, 정겨운 분위기의 미용실, 헌책방과 한문 간판 등이 옛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달동네세트장은 1960년대 중반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풍경을 재현했다. 달동네의 상징인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그 모습 그대로 가져와서 놀랍다. 벽에 쓴 ‘개조심’이라는 글자는 개를 기르지 않으면서도 도둑 퇴치용으로 그렇게 써 붙였던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 작은 집들이 층층이 쌓여 언덕 위로 이어지는 모습 속에 슈퍼마켓이 등장하기 전의 ‘상회’, 방앗간,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교회 등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가까이서 정을 나누던 아련한 기억을 자극한다.

변두리 세트장에서는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순양극장, 유흥문화를 즐겼을 텍사스 비어홀 등이 눈길을 사로잡고, 그 시절의 제품을 홍보하던 촌스러운 포스터가 웃음을 짓게 한다. 시간이 멈춘 듯한 장소인 만큼 아이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시절을 체험하는 장으로, 어른들에게는 아련한 옛 추억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장소가 돼준다. 전남 순천시 비례골길 24, 성인 3000원. (061)749-4003

◆그 시절로 데려가는 타임머신…선녀와 나무꾼

테마공원 선녀와 나무꾼에 있는 고고장의 DJ.
테마공원 선녀와 나무꾼에 있는 고고장의 DJ.
제주의 인기 명소 중 하나인 테마공원 선녀와 나무꾼(namuggun.com)은 1950~1970년대의 생활상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옛 추억을 되살려줄 물품들이 가득하다.

내부의 많은 코너 중 ‘추억의 학교’는 옛 학교생활을 만날 수 있는 곳. 실제 크기의 학교 건물, 운동장을 비롯해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까먹고 벌서는 인형들의 모습이 무척 정겹게 다가온다. 당시의 학습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어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직접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도심의 상가거리’에서는 사라진 고고장, 다방, 만화방 등 잊혀진 풍경들을 재현한다. 이곳 서점에는 대체 어떻게 모았을지 궁금하기까지 한 옛 잡지와 책들이 그득 쌓여 있다. 1950~1980년대 전후 극장의 모습을 되살린 ‘추억의 영화마을’은 옛 영화를 하루 종일 무료로 상영하는 곳으로, 흘러간 은막의 스타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중·장년층이 어린 시절 다녔을 거리 풍경을 충실히 재현한 ‘추억의 거리’,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야 할 군 시절의 고생담을 회상하며 만든 테마관 ‘추억의 내무반’, 굴렁쇠·팽이·고무줄 놀이, 그네타기 등의 놀이를 한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추억놀이 체험관’ 등도 관람객을 기다린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997, 성인 9000원. (064)784-9001
 인천 역사문화의 거리에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
인천 역사문화의 거리에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는 인천

인천 중구는 개항 당시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눈부시게 발전한 인천의 현재와 달리 100년도 훌쩍 넘은 건물이 곳곳에 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세대라면 어린 시절 실제로 뛰어다녔을 만한 거리 풍경이다.

특히 인천은 개항기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다. 차이나타운에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1883년 설정된 일본 조계지가, 왼쪽으로는 1884년에 마련된 중국 조계지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국경선 같은 역할을 했던 계단을 사이로 중국풍 건물과 일본식 건물로 분위기가 확 바뀐다.

120년간의 역사를 지닌 이 계단은 청·일 조계지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정비됐다. 경사가 급한 점을 감안해 계단 간격을 넓게 만들었고, 인천의 경관을 잘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계단 위쪽에는 중국 칭다오시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위치 탓인지 마치 양국의 싸움을 막으려는 정의의 사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특히 일본 조계지였던 중구청 앞 역사문화의 거리는 특이한 느낌을 더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역사 때문에 대부분 철거된 일본식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 번화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차이나타운과 달리 일본 특유의 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걷다가 복을 불러온다는 고양이 인형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일본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7번길 80.
소의 껍질 안쪽 아교질 부위로 만드는 수구레국밥(사진 위)  성남의 모란민속오일장(아래).
소의 껍질 안쪽 아교질 부위로 만드는 수구레국밥(사진 위) 성남의 모란민속오일장(아래).
때로 음식은 여행지 자체로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음식을 맛볼 때 잠시 잊었던 옛이야기가 함께 되살아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전통시장은 각 지역이 자랑하는 별미로 가득한 곳이니까. 이번 설 연휴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는 음식을 만나러 전통시장으로 떠나보자.

◆순대, 순창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법

선지와 채소로 속을 채운 피순대.
선지와 채소로 속을 채운 피순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북 순창하면 고추장을 떠올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순대를 먹고 오지 않는다면 제대로 순창을 즐겼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1923년 개장해 오랜 역사를 지닌 순창시장은 순대골목으로 전국에 이름난 전통시장이다.

순창 순대는 여느 순대와 좀 다르다. 우선 인조 껍질, 찹쌀, 당면을 쓰지 않는다. 대신 깨끗이 씻은 돼지 창자에 선지와 김치, 콩나물에 더해 마늘, 양파, 고추 등 10가지 이상의 양념과 채소로 속을 채웠다. 선지를 넣기 때문에 피순대라 불린다. 피순대는 옛날부터 마을 잔치나 큰일이 있을 때 돼지를 잡아 해먹던 요리다. 저지방, 저칼로리 음식으로 단백질과 비타민, 철분, 섬유질이 풍부한 영양식이다.

맛을 보면 순대 껍질이 쫄깃하고 선지는 고소한 맛을 낸다. 식감과 맛을 동시에 책임진다. 콩나물이 들어가서 해장국처럼 개운한 순댓국을 곁들이면 좋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뚝배기에 펄펄 끓인 순댓국이 보약이다. 언 몸을 절로 녹이고 뱃속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인원이 많다면 순대에 머리 고기, 채소까지 듬뿍 올린 순대전골이 어울린다. 순대와 함께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은 얼어붙은 마음도 녹인다. 끝자리가 1, 6일인 날에 열린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800.

◆배부름을 원망하게 되는 모란오일장

추억여행 맛 여행…어른들의 어린 시절·전통시장 먹거리
서울 지하철 분당선 모란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재래시장이 펼쳐진다. 모란민속오일장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권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6·25전쟁 직후 황무지였던 곳이 개간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1960년대 초반에 자연스럽게 생긴 장이 오늘에 이르렀다.

모란민속오일장 규모는 전국 최대 수준이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길이가 300m를 넘는다. 상인회에 등록된 상인만 1000여명에 이를 정도. 자리를 갖지 못한 노점상들과 생산물을 팔러온 농민들을 포함하면 상인은 약 1500명으로 추산된다. 물건을 사는 손님과 그저 둘러보려는 구경꾼까지 더하면 약 10만명이 발 디딜 틈 없이 오고간다.

허가된 장터는 화훼, 잡곡, 약초, 의류, 신발, 잡화, 생선, 채소, 음식, 애견 등 13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40여곳의 음식점이 모여 있는 음식부에선 대부분 손칼국수를 판다. 먹을 것 많은 모란시장에서 최고의 먹거리로 손칼국수가 꼽히는 건 맛 때문이다. 면은 커다란 도마 위에서 직접 만든다. 수제 면발임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눈앞에서 뽑아낸 면으로 칼국수를 만드니 맛과 재미가 동시에 전해진다. 칼국수에 청양고추와 양념장을 넣으면 더욱 좋다. 칼칼하고 담백한 국물이 쫄깃한 면발에 흡수돼 혀에 착착 감긴다.

방송에 소개된 맛집은 줄 선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장소가 좁아 옆 사람과 어깨를 맞대며 먹어야 하지만 그마저도 정겹다. 즉석에서 굽는 생선구이집, 가마솥에 튀긴 치킨, 메추리구이, 맷돌에 녹두를 갈아 두껍게 부친 녹두전 등 다른 메뉴도 다양하다. 게다가 한 잔에 3000원짜리 막걸리를 주문하면 전 등의 안주를 무료로 주는 선술집까지 있어 부른 배를 원망하게 한다. 4와 9가 들어가는 날에 장이 열리며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개장한다. 장이 서지 않을 때 시장은 공영주차장으로 활용된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4190.

◆겨울에 더 힘이 되는 수구레국밥

현풍백년도깨비시장에서 파는 수구레국밥.
현풍백년도깨비시장에서 파는 수구레국밥.
찬바람 부는 겨울에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그립기 마련. 대구 달성군에 자리한 현풍장터는 특히 수구레국밥으로 유명하다. 과거 현풍장터는 오일장으로 운영됐지만 지금은 현풍백면 도깨비시장으로 바뀐 뒤 상설시장이 됐다.

원래 현풍은 조선시대 달성군 일대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현풍 장터는 인근 대구, 유가면 사람들은 물론 전국에서 가축과 농산물을 판매하려는 상인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높았다. 장터 근처에는 1980년대까지 우시장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곳의 수구레국밥이 명성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시장에는 여러 식당이 오랜 전통을 내세우며 수구레국밥을 팔고 있다. 수구레는 소의 껍질 안쪽과 살 사이의 쫄깃한 아교질 부위를 말한다. 수구레의 식감은 소의 다른 부위와는 달라 마치 다른 종류의 고기를 맛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지방이 거의 없고 콜라겐과 엘라스틴 성분으로 이뤄져 있어서 느끼하지 않고 씹을수록 꼬들꼬들한 식감을 준다. 수구레국밥은 선지, 콩나물, 파 등을 푸짐하게 넣고 가마솥에 오랫동안 끓여 진한 국물을 우려낸다. 기본 반찬은 김치, 깍두기 정도면 충분하다. 국밥뿐만 아니라 수구레볶음, 무침회, 전골 등으로도 파는 만큼 식성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있다.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로6길 5.

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