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80년 전 오늘 오사카현 나카쓰 번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능을 갖췄지만 신분 탓에 성공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부친 때문에 계급사회에 강렬한 적개심을 품었다. 1853년 나가사키로 건너가 서양 자연과학과 기술에 몰두하고 학교를 세워 이를 가르쳤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862년에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다녔고 이 과정에서 서양문물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을 꾀하자는 ‘탈아시아’를 주창했다. 귀국 후 ‘서양사정’을 집필하며 막부의 개혁을 부르짖었고 이 책은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베스트셀러가 된 여러 책의 저작권료를 바탕으로 게이오의숙(게이오대 전신)을 세웠다.

메이지유신으로 막부가 몰락한 후 중앙정부에서 입각 제의가 잇따랐으나 거절하고 재야에서 회계학 등 근대학문 연구와 인재 육성에 전념했다. 1만엔권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만큼 그가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컸다.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이끈 국내 급진개화파에도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조선은 멸망하는 게 낫다’며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것은 ‘야만’, 대포 등 기술적 산물은 ‘문명’이라 칭하며 침략전쟁을 정당화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