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판 등 활성화…"출판 생태계를 바꿔라"
“새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기 전에 현재 책값이 타당한지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 책값은 온라인 할인가격을 정가로 매긴다 해도 비싸게 느껴져요.”(jasm****)

“책값을 적정하게 책정하면 온라인에서 할인을 그렇게 크게 할 수 없을 거고 대중들도 굳이 온라인에서 구입할 일이 없어요. 문제는 이익만 얻으려고 책값을 크게 부풀리는 출판사와 서점들. 함께 반성해야 합니다.”(choi****)

문고판 등 활성화…"출판 생태계를 바꿔라"
지난 11일 한국경제신문 A36면에 ‘막 오른 책 정가 인하 경쟁…구간 2000여종 최대 50% 내린다’란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 중 일부다. 수백개의 댓글 중 대부분은 ‘책값 거품’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출판사들이 정한 정가가 ‘제값’인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출판업계에선 오는 21일부터 시행되는 새 도서정가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조건으로 책값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 회복을 들고 있다. 지난 10년간 ‘무늬뿐인’ 정가제를 시행해 온라인 서점 중심으로 ‘반값 할인’이 성행했다. 게다가 최근 몇 달간 ‘최대 90% 할인’ ‘100원부터 선착순’ ‘1000원 미만 도서전’ 등 예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이벤트와 함께 대대적인 ‘재고 떨이’ 행사가 펼쳐지면서 소비자들의 ‘책값 불신’이 극도로 팽배해졌다는 설명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거의 쓰레기와 같은 책을 90% 할인 판매하면서 모든 책이 그런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며 “독자들에게 ‘새 정가제 시행 후 책을 얼마나 비싸게 사야 하나’라는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책값을 불신하는 소비자들의 생각은 대략 이렇다. ‘출판사들은 책에 1만원짜리 가격을 붙여 정가로 판매하는 것보다는 2만원 정가를 붙여 50% 할인해 1만원에 판매한다. 정가 대비 할인을 내세우는 게 판매량이 많아서다. 앞으로 정가대로 책을 사면 출판·유통사만 이익이고 소비자들만 손해 보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대형 유명 출판사 대표들은 “할인을 감안해 ‘책값 거품’을 씌운다는 것은 일부의 얘기”라면서도 소비자들의 반감을 의식해 ‘책값의 적정성’을 독자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종이 질과 인쇄 형태, 판형 등 원가와 이익률 등을 고려해 책값을 산정한 기준을 신간에 삽입지 형태로 넣거나 홈페이지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발행 후 18개월이 지난 책(구간)’에 다시 가격을 매길 수 있게 한 ‘구간 재정가(再定價)’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고 있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146개 출판사가 구간 2993종의 정가를 평균 57% 인하해 오는 21일부터 판매한다. 하지만 출판계에선 소설 에세이 등 같은 장르와 크기의 책에 대해 출판사가 매긴 가격이 발행 기간에 따라 크게 차이 날 경우 소비자들의 ‘정가 불신’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독자가 필요해서 책을 샀는데 한 달쯤 지나 정가를 다시 매겨 책값이 절반으로 떨어지면 억울하지 않겠냐”며 “신간을 낼 때 ‘일러두기’에 ‘이 책은 가격 재조정을 하지 않습니다’란 문구를 넣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새 정가제는 할인이 아예 허용되지 않는 ‘완전 정가제’가 아니어서 ‘정가 불신’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백원근 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책에 제값을 매겨 제값에 팔자는 게 정가제의 입법 논리지만 새 정가제에선 최대 15% 할인에 카드·통신 제휴 할인이 더해지면 25%까지 싸게 팔 수 있다”며 “가격 거품을 없애 제값을 매길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완전 정가제 시행과 함께 유럽과 일본 등 출판 선진국처럼 공공도서관 기능이 커지고 양질의 콘텐츠를 담은 ‘착한 가격’의 문고판 등이 많아져 독자들이 부담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가제 위반에 대한 철저한 단속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박대춘 서점조합연합회장은 “지금까진 정가제 위반을 신고해도 제대로 단속되지 않았다”며 “제도 운영의 허점을 이용한 편법·위법 할인이 판치면 신뢰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학습자료협회 한국서점조합연합회 교보문고 서울문고 영풍문고 알라딘 예스24 인터파크 등 주요 출판·유통 단체 및 업체는 오는 19일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자율적 상생 협약을 맺고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한다. 성명서에는 도서 가격 거품을 없애고 할인 폭이 줄어든 만큼 독자에게 착한 가격을 제공해 개정 정가제가 조속히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긴다. 출판업계 한 관계자는 “출판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한 정가제의 취지를 살리려면 업계 공동의 노력이 절실하다”면서도 “선언적 의미가 강한 협약 내용을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충돌해온 각 업계가 얼마나 지킬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송태형/박상익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