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이트 공연을 앞두고 그는 출연자들의 선정에까지 일일이 간여했다. 그는 특히 2막에 등장하는 꽃의 처녀들이 작품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 주최 측에 6명의 1급 소프라노를 선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는 또 이 6명의 성악가는 음색과 음역이 같아야 하고, 아름답고 늘씬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심사에 참여한 바그너의 관심을 끈 여인은 20대 중반의 영국 성악가 캐리 프링글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이 여성은 가냘프면서도 호리호리한 몸매와 쾌활함으로 노 작곡가를 매료시켰다. 1882년 7월26일의 공연을 앞두고 행해진 리허설에서 프링글을 다시 보게 된 바그너는 그의 연기 모습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노 작곡가가 왜 그리 흥분하는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바그너는 여성편력 부문에서도 챔피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바그너가 사랑한 여성들은 대부분 유부녀였다. 사업가의 부인이었던 마틸데 베젠동크와 나눈 사랑은 ‘베젠동크 가곡집’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수작 탄생의 기폭제가 된 영감의 불을 당겨 준 사랑이었다. 반면 프랑스 여성 작가인 유디트 고티에와의 사랑은 그 유치찬란함으로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꼴불견 사랑이었다. 고티에는 작가 카튈 망데스의 아내였다. 쾌활한 성격인 고티에의 비위를 맞추려 한 것일까. 노 작곡가는 37세나 연하인 이 여인 앞에서 바보가 됐다. 한번은 고티에가 보는 앞에서 정원수 위에 올라가는 용맹을 과시했고, 저택의 벽에 매달리는 곡예를 펼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남다른’ 여성 편력으로 고통받은 것은 부인 코지마였다. 다행인 것은 코지마가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었다. 그는 남편이 바람피우게 된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운명을 신의 뜻으로 생각하며 묵묵히 삶을 이겨나갔다. 그는 남편의 외도가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티에와 남편의 관계를 뒤늦게 알아차린 코지마는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이 잘 이뤄지도록 돕는 오지랖을 과시할 정도였다.
바람둥이의 사랑이 진득할 리는 없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고티에와의 사랑도 시간이 가면서 점차 시들해졌던 것이다. 그때 프링글이라는 요정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어쩌면 또 다른 사랑의 여신을 찾아 오디션에 참석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초연의 날. 1882년 7월26일. 그날은 음악사에 길이 빛날 세기의 공연이 이뤄진 날이었다. 그러나 공연의 옥에 티는 한 노인네의 주책맞은 행동이었다. 바로 직접 무대연출을 맡았던 바그너였다. 그는 2막 마법의 정원 장면에서 프링글이 열연하자 큰소리로 ‘브라보’를 외쳤다. 이 매너 없는 신사가 바그너인 줄도 모르고 관객은 쉿 소리를 내며 제지했고 다들 양미간을 찌푸렸다. 바그너의 ‘매너 실종’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른 공연에서도 의연히 이어졌다. 물론 그가 그렇게 흥분된 행동을 보인 이유를 공연 참가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연습 때건 파티석상에서건 프링글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사가들에게 대단한 입방아거리를 제공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궁금증만 남긴 채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프링글이 다음 시즌 밀라노 라스칼라좌에 상시 출연하게 된 점으로 보아 바그너가 힘을 썼다는 풍설만이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대중은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1883년 2월12일 바그너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주치의는 ‘심리적 흥분’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고 진단했는데, 이 점은 그의 사인이 프링글의 문제와 관련됐음을 암시한다. 같은 해 9월 바그너는 베네치아를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페니체극장 측에 프링글을 초청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한다. 딸 이졸데의 증언에 따르면 이 일은 코지마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고, 이 일로 두 사람은 크게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코지마도 입을 다물었고, 프링글도 평생 바그너의 ‘바’자도 꺼내지 않았다.
희대의 바람둥이 바그너는 끊임없는 애정 행로를 통해 영감을 얻었지만 그것은 반대로 그의 명을 재촉하는 독약이기도 했다. 그는 최후의 역작 ‘파르지팔’을 통해 관객에게 사랑은 죽음과도 맞바꿀 가치가 있음을 노래했고, 그 자신 사랑의 순교자가 됐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