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설이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이라고 흔히 말한다. 재미가 첫째요,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둘째다. 이런 기준이라면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다카노 가즈아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제노사이드》는 훌륭하다.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같은 종(種)을 서로 죽이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은 세 지역에서 시작한다. 한 곳은 일본. 약학대학원생 고가 겐토는 급사한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발견한다. 자신이 연구하던 불치병 치료제를 한 달 안에 개발하고 한 외국인이 찾아오면 그 약을 건네주라는 것. 연구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가는 자신을 찾아온 사카이 유리라는 여성을 통해 다가오는 위험을 느낀다.

또 다른 장소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이라크에서 일하던 민간 군사업체의 용병 조너선 예거는 불치병에 걸린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된다. 콩고의 어느 피그미족 집단과 나이젤 피어스라는 인류학자, 정체불명의 생물체를 없애라는 지시다. 이 작전의 표면적 목적은 신종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것이었지만 목표에 도달한 예거의 팀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아차린다. 이에 온갖 살육이 벌어지는 ‘슬픈 대륙’을 벗어나 일본으로 가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고가에게 닥친 위험과 예거가 빠진 함정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진화한 생물체를 없애기 위해 꾸민 미국 백악관의 음모였다. 미국과 일본, 콩고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실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력을 초월한 생물체가 등장하는 공상과학(SF)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허무맹랑하거나 상투적이지 않다. 초월적 존재에 대비해 인간의 잔혹성을 여지없이 보여주기에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눈앞에서 보는 듯한 전투 장면을 읽다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와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평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손을 서로 맞잡는 행위에서 인간이 연결된다’는 희망도 놓지 않는다.

작품은 정치적이기도 하다. 작품 속 미국 대통령은 한때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신앙’으로 극복하고 이라크를 침공하는 그레고리 S 번즈인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부통령인 체임벌린은 전직 국방장관이며 군산복합체를 운영했던 인물로 나온다. 딕 체니의 이력과 같다. 단순한 풍자에 그치지 않고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정이 몇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 정치의 실상을 생각하게 만든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모든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한 인간은 호전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그런 인간을 리더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는 집단의 의사를 체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2004년 어느 여름밤에 열린 백악관의 회의에서 어떤 정보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돌았는지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열 명을 넘지 않았다.’

일본인인데도 작가는 일본이 과거 한국과 중국에 가했던 만행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고가의 정의감 넘치는 친구로 등장하는 인물은 일본인을 구하고 대신 숨진 고 이수현 씨를 모델로 삼았다.

전 세계를 오가는 작품의 스케일, 쉼없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상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듯하다. 영화로 만든다면 수십 시간의 영상이 될 서사를 빈틈없이 전개하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