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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茶山을 현재의 프레임에 가두지 말라



1762년 6월16일(음력) 태어난 다산 정약용이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조선 후기 최고의 개혁사상가인 다산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민생과 부국강병을 위한 그의 생각은 당시 조선의 모순된 현실과 법제 어느 곳이든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렇기에 다산은 비슷한 시대를 산 애덤 스미스에 필적할 만한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가 존경받는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선 다산을 현대의 단어와 프레임에 가둬놓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농업 위주의 왕조·신분 사회에서 살았던 다산을 상공업 중심의 현대 민주사회에 단순 대입하는 아전인수식 논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다산의 소위 토지개혁론이다. 다산은 38세였던 초년에는 30가구로 구성된 여(閭)의 공동소유·공동경작 방식인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8가구 단위로 개별경작과 조세 납부용 공동경작(9분의 1)을 병행하는 정전제(井田制)를 내세웠다. 초기에 공상적인 여전제로 출발했지만, 오랜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백성의 궁핍한 현실을 목도한 뒤엔 농업생산 극대화와 조세개혁에 초점을 맞춘 정전제로 발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제가 공산주의 협동농장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다산을 아시아 공산주의의 비조(鼻祖)쯤으로 여기는 이들까지 있다. 또한 다산의 사상을 이른바 경제민주화의 단초라고 비약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의 맥락과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언어의 왜곡이다. 다산의 개혁론은 병자호란 이후 농업이 무너지면서 과세대상 토지가 3분의 1이나 급감했고, 전정(田政)의 문란으로 조세의 불평등이 극심했던 시대에 나왔다. 다산이 농업 전문화와 더불어 상공업 분리를 통한 증세와 화폐유통에 관심을 둔 것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다산을 왜곡하는 또 다른 부류는 실학을 논한다면서 실제로는 주자학적 사고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부 연구가들이다. 다산은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주자학을 우회 비판했던 것인데, 유학자라는 관점만 차용해 졸지에 주자학자로 되돌려 놓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한국경제신문이 다산 사상에 대한 심층 기획시리즈를 시작했다. 새로운 조선을 꿈꿨던 다산의 진면목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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