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시대 둘 다 적절치 않아…빼거나 '기원' 쓰는 게 대안
박성래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과학사 parkstar@unitel.co.kr >
우리 국보에는 서양기원인 ‘서기’보다 단군기원인 ‘단기’를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홈통 속에 넣은 새 상량문은 순 한글로 “바로 오늘 서기 2012년 3월8일…”로 시작한다. 역시 ‘서기’를 썼다. 10m 한지에 2500자가 빼곡한 이 상량문의 복원 경위 등은 기존의 상량문들과 함께 함에 넣어 마룻대 옆에 영구 보관된다.
‘서기’만 썼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문화재청은 그 홈페이지에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현재의 연도 표기는 ‘대한민국의 공용연호(公用年號)는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 한다’는 ‘연호에 관한 법률’에 따랐다는 설명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제 때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같은 일본 연호를 쓰던 우리는 1948년 건국과 함께 ‘단기(檀紀)’를 채택했다. 그해 9월9일 국회는 연호를 ‘대한민국 30년’과 ‘단기 4281년’ 두 안을 놓고 논의한 끝에, 투표로 단기를 채택했다. 이것이 첫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4호)이다.
이렇게 채택했지만 전 세계에 ‘단기’ 연호를 한국밖에 쓰는 사람들이 없다보니 국제 교류가 많아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2333을 더했다 빼는 환산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불편, 그리고 역사 교육의 혼란 등이었다.
결국 1961년 세계가 거의 다 채택하고 있는 서기를 우리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이 두 번째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75호, 1961년 12월2일)이다. 문화재청이 인용한 바로 그 법률이다. 그 부칙에 따라 기존의 법률 제4호는 폐지되고, 서기 1962년 1월1일부터 서기가 사용돼 왔다.
그러니 문화재청이 상량문에 서기를 표기한 것이 법률적으로는 옳은 일일 터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서기 사용이 마뜩지 않고, 그냥 ‘2012년’으로 썼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만약 숫자 앞에 무엇인가 붙이고 싶다면 ‘기원 2012년’이라 쓰면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법률 775호를 제정할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약했고, ‘단기’를 기본으로 쓰고 괄호 속에 ‘서기’를 넣던 시기였다.
하나 서력기원은 그때 이미 서양의 기원이기보다 세계공통의 기원이었다. 그러니 우리 법률 제775호는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에서 비롯한) 세계 공통의 기원으로 한다’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우리가 연호를 바꾼 것은 세계 공통의 연호를 채택한 것이지, 서양 것을 따르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세계화 시대에 우리만 단기를 새삼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쓸 데 없이 ‘서기’란 말을 사용해 민심을 자극하는 일도 좋은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2012년’이라 썼다 해서 그것을 ‘단기 2012년’으로 오해할 후세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서력기원에는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가 있다. 그 원래 뜻은 ‘예수 이전’과 ‘주님 이후의 해’란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그리 번역하지 않는다. ‘기원전’ ‘기원후’라 옮길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서력기원’은 ‘기원’으로 옮겨 충분하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서기’란 말을 쓰지 말자고 여러 기회에 강연도 했고, 글도 써 왔다. 그리고 내 주장이 제법 받아들여져 있는 줄로 생각했다. 그렇게 자만했던 내 생각이 아주 잘못이었다는 사실이 이번 숭례문 상량문의 ‘서기’ 등장으로 드러났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써늘한 기분이다.
한창 총선 열기가 뜨겁다. 새로 등장하는 국회의원들이 <‘서기’ 사용 중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서 상상해보곤 하는 요즈음이다.
박성래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과학사 parkstar@unite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