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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선율] '아를 여인'의 치명적 매력 화폭에 담고 싶었던 반 고흐

그 앞에 40대 여인이 섰는데…

고갱'밤의 카페' / 반 고흐'아를의 여인'

고갱이 찾아낸 중년의 모델…알고보니 구면의 지누부인
술잔 앞에 앉은 카페마담…독서하는 정숙한 여인
한 모델 서로 다른 모습 묘사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는 아를 여자들은 정말로 아름답단다. 그들은 프라고나르(18세기 프랑스 화가)나 르누아르가 그린 여자들 같아.”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아를로 이주한 후기 인상파 화가 반 고흐(1853~1890)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아를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는 이 여인들의 아름다움이 예전만은 못한 듯하고 퇴폐적이고 병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곳 여인들은 여전히 그를 매혹할 만큼 아름다웠고 화려한 의상을 휘두른 그들의 자태는 색채에 민감했던 반 고흐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를의 여인들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들은 알퐁스 도데의 ‘아를의 여인’에 등장하는 팜 파탈 그 자체였다.

반 고흐는 이 아름다운 아를의 여인들을 자기 작품의 모델로 삼고 싶었지만 침울하고 자신감 없는 가난뱅이 화가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여기에는 초상화를 그리면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한 아를 사람들의 미신도 작용했다. 조바심이 난 반 고흐는 10대 초반의 앳된 소녀 한 명을 꼬여 ‘일본 소녀’라는 초상화의 모델로 삼았지만 그가 꿈꾸던 전형적인 아를 처녀는 아니었다.

그의 초청으로 폴 고갱(1848~1903)이 아를의 ‘노란 집’(반 고흐의 아를 거처)에 합류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여자를 구워삶는 데 남다른 재주를 지녔던 이 야성적인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짜’ 모델을 구했던 것이다. 고갱은 모델을 구했다고 우쭐댔고 반 고흐는 그의 ‘작업’ 능력에 경이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그 모델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누 부인일 줄이야. 반 고흐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처음 아를에 왔을 때 묵은 ‘카페 드 라 가르’(역전 카페)의 안주인으로 마흔 살의 중년이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곳은 갈 곳 없는 뜨내기들이 싸구려 압생트(쑥으로 만든 독주) 한 잔 시켜놓고 밤 시간을 보내는 허름한 카페였다.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좋아하는 포근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물론 그가 그토록 화폭에 담고 싶어 했던 전형적인 아를 처녀는 아니었다.

약속한 날, 홀아비 냄새가 진동하는 노란 집으로 지누 부인이 찾아왔다. 카페 여주인이라 사람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지만 막상 두 독신남 앞에서 모델을 선다고 하니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감을 잡은 고갱이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커피를 권했고 “지누 부인, 당신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게 될 거예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제야 부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당연히 부인의 앞자리는 고갱의 차지였고 반 고흐는 측면에서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두 남자는 무슨 사생대회라도 참가한 것처럼 공을 들여 여인의 얼굴을 화폭에 옮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그림이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과 고갱의 ‘밤의 카페’다. 사실 반 고흐의 작품은 지누 부인의 외모를 지나치게 이상화했다. 그는 부인을 아를 전통복장 차림의 지적인 여성으로 묘사했다. 노란색 벽지를 배경으로 초록색 탁자 위에 턱을 고인 부인은 독서를 하다가 사색에 잠긴 모습이다.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아를의 여인들이 퇴폐적이라며 입방아를 찧던 그지만 ‘아를의 여인’ 속에서 그런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은 되레 고갱의 작품에서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나서 흥미롭다.

‘밤의 카페’는 고갱이 처음에 지누 부인만 스케치한 뒤 ‘카페 드 라 가르’의 밤 풍경을 한데 조합한 것이다. 화면을 보면 앞쪽에 지누 부인이 자리하고 있고 뒤쪽에는 두 무리의 인간군상이 묘사돼 있다. 지누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왼쪽 팔로 턱을 받치고 있다. 그 표정 속에는 반 고흐의 작품과 달리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화면 뒤쪽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왼쪽의 두 사람은 갈 곳 없는 부랑자로 한 사람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쪽잠을 청하고 있다. 오른쪽 식탁의 세 남자는 흰 모자를 쓴 창부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누 부인의 카페는 매춘 허가를 받은 업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여인은 길거리에서 남성들을 호객한 뒤 카페에 들어와 압생트를 마시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의 카페에는 짙은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부랑자들과 순간적 쾌락에 자신을 맡기는 사내들, 몸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창부 등 소외된 자들은 그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카페의 붉은 벽은 그런 점에서 현실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소외된 자들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데 제격이다.

고갱은 검은색 선으로 형태를 윤곽지운 후 그 내부를 단색조의 컬러로 처리, 화면에 평면적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데 이는 일본 에도시대 채색판화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것이다.

반 고흐는 그토록 화폭에 담고자 했던 아를의 매력적인 처녀를 끝내 화폭에 담지 못했다. 고갱도 헛물만 켰다. 둘은 그저 마흔의 중년 여인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아를의 여인들이 퇴폐적이라던 반 고흐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반 고흐가 얼마 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돌봐준 사람은 바로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비제의 모음곡 '아를의 여인'

아를은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지만 예로부터 빼어난 미인이 많기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반 고흐가 아를행을 택한 것은 그곳이 평소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처럼 날씨가 좋은 데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부분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아를의 매혹적인 여인을 다룬 음악을 찾는다면 조르주 비제(1838~1875)의 모음곡 ‘아를의 여인’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알퐁스 도데(1840~1899)의 동명 희곡을 상연할 때 부수음악으로 작곡된 것으로 1872년 보드빌 극장에서 초연됐다. 음악은 호평을 받았지만 연극은 흥행에 실패했다.

희곡은 비극적인 사랑으로 가슴앓이하다 숨진 한 청년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아를 부근의 카마르그에 프레데리라는 한 부농의 아들이 있었는데 품행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미모의 여인에 반해 결혼하려 한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소꿉친구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러나 결혼식 전날 축하잔치에 나타나 춤추는 아를의 모습을 보게 된 프레데리는 좌절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는 얘기다.

비제는 이 극을 위해 모두 27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4곡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으로 편곡했다. 비제가 37세로 요절한 뒤 4년 후에는 에르네스트 기로가 추가로 4곡을 편곡해 제2모음곡을 만들었다. 비제가 들으면 섭섭할 일이지만 오늘날 대중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은 제2모음곡이다. 그 중 플루트와 하프의 합주인 제3곡 미뉴에트는 독립적으로 연주될 만큼 인기가 높다.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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