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원뿌리를 찾아서 보령리 초입으로 들어선다. 1431년(세종 12)에 쌓은 보령읍성이 나그네를 맞는다. 옛 동헌 터인 보령중학교 교정에서 몸돌 한 개를 잃어버린 '4층' 고려석탑을 일별하고 나서 학교 공사 때 손상된 성벽을 할석(깬돌)으로 '복원'한 630m 길이의 성벽을 걷는다. 북문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커다란 석괴를 쌓고 틈 사이에는 쐐기돌을 끼워 넣은 조선 전기 읍성의 특징이 잘 드러난 '원조' 성돌을 만난다. 역시 성벽과 장맛은 묵어야 제맛이다.

보령리의 끝 향교말,1723년(경종 3)에 처음 지은 보령향교를 찾아간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향교의 직원(直員)이었다는 소설가 이문구(1941~2003)의 할아버지께서 마가목 지팡이를 짚고 외삼문을 걸어나오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하릴없이 발길을 돌린다. 청소면 진죽리 청소역(옛 진죽역)역사는 1961년에 지은,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이다. 지금은 하루 8회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지만 이 역사도 곧 역사의 박제가 되리라.


◆종이배를 띄워도 될 만큼 잔잔한 항구

오천항은 1896년 폐영되기까지 386년간 충청 서해안 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사적 제501호)이 있던 곳이다. 아름다운 돌무지개문인 서문(망화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주던 진휼청과 수인사를 나눈 후 서북쪽 성벽에 올라서자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면이 어찌나 잔잔한지 종이배를 띄우고 싶을 지경이다.

천북면과 오천면을 잇는 보령방조제(1082m)를 곁눈질하면서 성벽을 돈다. 심술궂게 성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는 도로를 건너 초등학교 정문으로 쓰이던 수영의 내삼문인 공해관과 1986년까지 오천면 사무소로 쓰이던 장교청이 있는 언덕으로 간다. 장교청엔 수영의 관리들이 앉아서 군무를 논하던 정면 3칸,측면 2칸의 우물마루가 깔렸다.

한때는 군선 142척에 8414명의 수군이 북적거렸던 충청수영성.그러나 지금의 오천은 잠수기 어업으로 키조개를 채취하는 어선들이나 들락거리는 한적한 어촌이다. 이곳에선 금어기인 7~8월 산란기만 빼고 언제든지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키조개를 맛볼 수 있다.

키조개와 더불어 '강게미'라 부르는 간재미회 무침도 이곳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채소와 갖은 양념을 넣고 버무린 간재미회는 겨울철의 미각을 돋우는 별미다. 보령화력으로 가는 길목엔 '갈매못성지'가 있다. 병인박해(1866년) 때 프랑스 선교사인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등 5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이렇게 외진 바닷가로 순교자들을 끌고 와 처형했던 까닭은 고종의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념전시관 안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저서와 전례 때 입었던 긴 중백의(中白衣)가 전시돼 있다. 화장실이라도 가기 위해 금방 벗어놓은 것처럼 새것이다.


◆옛이야기 지즐대는 '잠수교' 한내돌다리

보령 화력발전소가 생기기 전만 해도 맛 좋기로 소문난 '고정 김' 생산지였던 주교면 고정리 고개를 내려선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 '고만'이라 불렀다는 고만 마을 뒷산의 토정 이지함(1517~1578) 묘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 한산 이씨 종산엔 14기의 묘가 있는데 《토정비결》을 남긴 토정의 묘는 네 번째 열 왼쪽에 있다. 그의 묘소는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살며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 했던 것답게 달랑 비와 상석만 놓인 조촐한 모습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청하현감(현 포천) · 아산 현감을 지낸 그가 "현감으로 있으면서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고 적고 있다. 18세기에 놓은 한내돌다리를 찾아 보령시내 대천천 하류로 간다.
이곳에서 10리가량 떨어진 왕대산(139m)의 돌들을 뗏목으로 운반해 넓적한 판돌로 다듬어 놓은 이 다리는 당초 22칸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92년에 대천천 가에 세로로 복원한 다리는 겨우 6칸뿐이다. 이 다리의 완공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비로소 대천천을 우회하지 않고 남포와 보령을 직선으로 오갈 수 있게 됐을 것이다.

보령 경찰서 앞 첨성대 모양의 망루는 한국전쟁이 남긴 생생한 유물이다. 6 · 25전쟁 때 성주산 일대 빨치산의 습격에 대비해 쌓은 토치카다. 자연석과 콘크리트를 섞어 쌓은 높이 10m에 둘레 30m 크기의 이 토치카에는 밖을 내다보며 사격할 수 있는 22개의 총구가 뚫려 있다.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도 베어지고

소설가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의 무대이자 그의 생가가 있던 보령시 대천동 관촌마을을 찾아간다. 《일락서산》(1972년) 등 8편으로 이루어진 《관촌수필》은 자전적 회상을 통해 전쟁에 휩쓸린 가족사와 주변 농민들의 인생유전을 충남 토속어로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연작 첫 편 '일락서산'에 적힌 대로라면 그의 생가는 대천읍 대천리 387이다. 그곳에는 김정길이란 문패를 단 건평 30평쯤 돼 보이는 2층 슬라브 양옥집이 들어서 있다. 나그네에게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 마당 가 중년의 모과나무를 뒤로 한 채 여전히 관촌마을 들머리를 지키는 은행나무로 간다. 나무 아래엔 1995년 한내문학회가 세운 '관촌마을비'가 서 있다. 비는 '서쪽 언덕 위의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는 아직 남아 있다'고 적고 있지만 그 팽나무도 마을 옆 아파트단지 공사 때 베어진 지 오래다.

'일락서산'에서 13년 만에 고향을 찾은 작가는 사뭇 변해버린 고향 풍경 앞에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라고 탄식한다. 어쩌면 《관촌수필》 연작은 산업화 · 도시화로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고,삶의 바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작가가 세상을 향해 '변하지 않는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묻는 쓸쓸한 독백이었는지 모른다.

고은 시인이 일찍이 "실개천 보고도 섬겨/ 당신이라고 사랑하옵는 순정 아니던가"( 시 '대천 이문구')라고 썼을 만큼 그는 이 삭막한 시대에서 '순정 종결자'로 살다 갔다. 다복솔밭 어디선가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관산추정')는 그의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고만 마을 뒷산엔 토정비결 쓴 이지함 선생의 묘
비·상석만 놓인 조촐함이 '청빈한 선비'와 닮아


맛집

대천항으로 가는 해안도로의 남곡동 856의 3 보령해물칼국수(041-931-1008)는 쫄깃한 면발과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이 일품인 집이다. 칼국수를 시키면 먼저 보리밥과 열무김치가 나온다.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고 나면 입안이 얼얼해 다음에 먹을 칼국수의 시원한 맛을 더 잘 느끼게 된다. 생고기와 야채 호박 양파 부추 등을 섞어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소를 넣어 찐 만두도 쫀득쫀득하고 담백하다. 해물칼국수 5000원,왕만두 5개 5000원.

여행정보

옛날에는 고만도 또는 고란도라고 불렸던 원산도는 행정구역상 보령시 오천면에 속하며 충남에선 안면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해안선을 따라 잘 발달한 해식애와 암초,알맞은 수심 등으로 갯바위 낚시에 그만이다.

봄철에는 숭어 우럭 놀래미가 많이 잡힌다. 특히 음력 보름이나 그믐 때(15~18일,30~3일)에 맞춰 가면 밤에 랜턴을 켜고 바위틈을 기어 다니는 칠게나 세발낙지 해삼 골뱅이 소라 등을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