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막된 '백자 달항아리' 전은 국내 처음으로 백자 달항아리만 모은 전시다.그래서인지 개막일에는 2만여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달항아리는 둥근 모양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조선백자 항아리를 가리킨다.국립박물관장을 지냈던 혜곡 최순우선생은 달항아리를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했다.삼불 김원룡선생은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라고 노래했다. 달항아리 중 높이가 40cm 이상인 항아리를 '백자대호(大壺)'라고 부른다. 이번 전시에 나온 9점은 모두 백자대호다. 국보 제262호(우학문화재단 소장)와 보물 제1424호(삼성미술관 소장)를 비롯해 문화재청에서 최근 보물로 지정한 달항아리 5점이 포함돼 있다. 이뿐 아니라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품과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하 오사카미술관) 소장 달항아리도 감상할 수 있다. 오사카미술관 소장품은 사연이 깊은 달항아리다. 이 백자대호는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의 관음원 주지였던 카이운 스님이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다. 이 스님은 거처 정원에 항아리를 가득 모아 놓아 '항아리 법사'라고도 불렸다. 이 중 백자대호를 응접실 가장 소중한 곳에 놓을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카이운 스님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자였던 시가 나오야로부터 이 항아리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생계가 어려워 스님의 은혜를 받은 시가가 도쿄로 돌아온 후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이 항아리를 카이운 스님에게 선물로 줘 '시가의 항아리'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다음은 오사카미술관의 이토 이쿠타로 관장(74)이 지난 16일 한 강연회에서 밝힌 실화. '시가의 항아리'는 1995년 7월4일 대낮에 절에 침입한 한 절도범에 의해 도난당한다. 항아리를 훔쳐 도주하던 남자를 경비원들이 뒤쫓아 포위하자 이 절도범은 달항아리를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경비원들이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난 달항아리를 보고 있는 사이 절도범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당시 셀 수 있는 파편만 해도 300조각을 넘었고 주지스님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가루까지 솔로 쓸어 봉투에 담았다. 이 사건 이후 항아리 파편은 오사카미술관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미술관에 기증됐고 미술관은 2년에 걸친 검토 끝에 항아리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 복원하느냐가 고민거리였다. 항아리 수리·복원 전문가는 어디서 어떻게 보더라도 파손된 것을 알 수 없도록 할 것이냐,아니면 자세히 보면 복원 수리한 흔적을 알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술관측은 후자를 택했다. 전문가에게 의뢰한 지 1년 만에 항아리 파편은 원래의 달항아리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는데 복원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기적의 복원'이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한다. 미술관측이 복원 완성을 기념한 특별전을 열자 나라 시민들이 서로 기쁨을 나눴고 200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전시돼 도자 전문가들로부터 "한국도자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높이 45cm인 이 달항아리는 입지름이 21.2cm로 출품된 9점 중 두 번째로 큰 게 특징이다. 몸체가 약간 기우뚱하고 입술이 반듯하지 않은데 이런 점에서 오히려 '부정형의 정형미'를 느끼게 한다. 18세기에 제작된 걸작품이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