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배재대학 화학과 오영기교수(44)는 연구기관의 통폐합으로 기구한
연구생활을 경험한 경우이다.

그는 91년5월 원자력연구소에서 이 대학으로자리를 옮겼다. 비록
연구여건 등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그래도 요즈음은 일을 할수있는
안정감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구소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린다는 얘기다. 연구소에 대한 자부심이 연구소를
떠나버린 지금까지도 미련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신인 과학원에서 화학박사학위를 받은
오교수가 79년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과기처산하 연구기관인 핵연료공단.
핵재처리를 위해 원자력연구소에서 분리돼 정치적으로 세워진 연구기관
이었다. 당시 여러 대학에 자리가 있었지만 대덕연구단지가 막 시작되던
때라 연구에 많은 유혹을 받고 뛰어들었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화학전공자
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곳이 자신이 생각했던 곳보다 활동적인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2년정도가 지난 뒤였다. 핵연료공단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프랑스와 핵재처리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구상하다 미국의 압력으로 취소함으로써 할 일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는 의무기간만 채우고 이곳을 뜨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후 10.26사건이 터지고 핵연료공단은 에너지연구소로 흡수
통합됐다.

또 조금있다가 유사부서 통폐합조치에 따라 에너지연구소도 서울의
원자력연구소에 흡수통합돼 오교수는 어느새 3군데의 연구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이런 와중에 그의 연구분야는 전공과 조금씩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갔고 급기야는 전혀 무관한 곳까지 가게됐다. 화학을 전공한 그가
핵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수행해야할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통폐합에 따라 흡수된 대다수의 연구원들도 마찬가지로 전공이외의 분야로
흘러갔다고 오교수는 술회한다.

"월급을 받을만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하게 됐지요"박사급
연구원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월급을 받을 때의
고통스러움은 그냥 참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구소를 뜨겠다는 결심이 서면서 틈틈이 전공분야의 연구를 했다.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봐가면서.

"저의 이직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될 것입니다. 연구소에서 기여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누가 뭐라해도 대부분의 연구원들에게
요즈음의 연구기관은 일할 만한 곳입니다" 오교수는 연구원들이 긍지를
되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연구기관은 수많은 변천사를 겪어왔다.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불리던 KIST도 5공시절 과학원과 통합됐다가 우여곡절끝에 두 기관이 다시
분리 독립되기도 했다. 대덕연구단지의 많은 연구기관들도 같은 운명을
거쳤다. 또다른 연구기관의 통폐합이 언제 어느때 진행될지 모른다.
그때마다 연구원들이 모두 국가발전에 기여할만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지 의문일수 밖에 없다.

<윤진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