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문화인물 위암 장지연이라고 하면 황성신문의 명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연상하게 된다. 위암은 그 만큼 우리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구한말의 특출한 언론인이었다.

장지연은 조선조 고종원년에 경북 상주에서 부친 장용상과 모친 문화 유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위암 또는 숭양산인이고 본관은 인동.

위암은 6세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9세때 모친을
잃었고 12세에 의지하던 조모마저 별세하는등 비교적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장지연은 먼 할아버지뻘 되는 장석봉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수학하여
19세때는 한학에 통달,문장에 일가견을 이루게 되었다.

위암은 관운도 좋지않아 22세때 향시에는 급제하였으나 회시에는 실패했고
24세 27세때 계속 정시에 실패한뒤 31세에 진사병과에 급제하게된다.

그러나 그는 사례소의 직원과 내부의 주사를 겸직하는데 그치고 만다.
그가 정치적 격동기인 구한말에 서울에 있었다는 사실은 벼슬길보다 국가적
사명감을 더 고취했었을것 같다.

장지연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했고 36세때는 황국협회의 기관지
시사총보의 주필로 언론계에 첫발을 딛는다. 그는 창간호의 발간취지문에서
"신문이란 사기의 유"라고 규정하고 "논설이란 사가의 평론하는 체요
잡보란 사가의 기사하는 체"라고 그의 언론관을 밝혔다.

논설이란 지금의 사설이고 잡보란 기사에 해당된다.

위암은 1898년에 창간된 황성신문 주필로 옮겼다가 8월에 사장에 취임
한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술에 취한 채 "시일야
방성대곡"을 쓰기 시작했으나 끝부분을 남겨둔채 쓰러져 유근이 마무리를
지었다한다.

황성신문은 정간당했고 위암은 경무청에 잡혀갔으나 그의 기백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때 영국인 배설과 양기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해 위암은 석방되고 황성신문도 복간된다.

그러나 위암은 언론계를 물러나 휘문의숙장이 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등 형극의 길을 걷는다. 감동적인 것은 위암이 상해에서 배설을
만나 술을 마시며 통곡하는 장면이다. 그는 1921년 마산의 자택에서
스님의 독경속에 잠들듯 운명했다. 향년 5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