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 기대되던
시문학의 침체와 왜소화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다. 특히 젊은 시인들은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허무주의에 빠지는등 조로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최근 출간된 반년간지 "오늘의 시"(현암사간)에
기고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시인들"을 통해 금년 상반기의 시들을
총평하며 시인들의 나약한 현실인식이 더욱 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씨의 이러한 견해는 최근 서정주의로의 복귀,신서정등의 경향을
전통회복으로 추켜세우는 분석과 대조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박씨는 "추억과 자연과 서정성에로의 복귀는 자칫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분석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유예시킬 수 있다"며 "삶의 이면을
파헤치고 허구화된 욕망의 구조를 전복시키기 위한 도전적인 해체적
실험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씨는 시의 대중화등의 경향으로 90년대 시단은 양적으로는 풍성해졌지만
질적인 면에선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탈이데올로기 탈중심 가치다원주의가 상투어가 될 정도로 시대상황은
80년대와 분명히 달라졌지만 그것에 걸맞는 문학적 성과는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단일한 이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오히려 허탈감과
방향상실감 등만 드러내 시적 긴장은 이완됐고 미시적인 삶에 주목하고는
있지만 자잘한 일상의 잡담에 떠밀리면서 소극적 태도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상의 미시적 현실을 움직이는 정치적,산업사회적
매커니즘에 대한 정교하고 긴장된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지만 최근의
시인들이 보이는 관심은 궁극적인 전망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자에게
남겨진 누추한 현실로서의 일상과 그것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는 시인들의
우울한 체념이라고 분석한다.

이것을 박씨는 젊은 시인들의 의식의 조로현상으로 풀이한다.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대한 좌절과 쓰디쓴 환멸을
맛보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젊음을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휘청거리는 것이 그 모습. 상실된 시간에 대한 회한과 향수에 젖어있는
모호한 추억과 회상의 언어들이 시 속에 폭넓게 자리잡고 자연과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경사가 이들의 특징적 경향이다.

박씨는 이것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시인들,그 거울 속에서
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조바심으로 안달하는 희망과 탈진된 좌절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 너머에 있는 변함없이 순수하고 의연한 나무며 숲이며 꽃이며
새이다"고 비유하고 있다. 이것이 박씨가 보고있는 젊은 시인들의
조로이다. 그러한 심리 속에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도사리고 있고
불가항력적인 현재는 돌이킬 수 없는 채로 놓아둘 수 밖에 없다는
처연하면서도 무기력한 체념적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평론가 김진수씨는 "90년대 시가 보이는 현상적인 잡다함만을 열거하는
다원화의 경향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억압기제를 오히려 공고히 해주는
역할만을 할것"이라며 "도시적 일상이나 문학의 대중화를 주창하는 시들은
타락한 대중문화와 결탁하여 상업성을 드러낼 수도 있고 신서정이나
정신주의의 경향은 전통사상이나 복고적인 정서를 강조하여 보수주의화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