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섰다. 올해는 1천7백억달로,그리고 오는 2000년에는 3천5백억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60년대초 1억달러에 불과했던것에 비하면 엄청난 비약이다.
수출증가율로만 따지면 62년부터 87년까지 25년동안 연평균 31.1%에 달하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바로 경제성장으로 연결돼 최근 30년동안의
발전이 지난 5천년간의 그것을 능가한것으로 평가되고있다.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력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우연히 맞게된 국운의
상승기류 탓이었을까. 그 어느쪽이든 우리에게는 현재 세계14위교역국의
하나로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무역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것은 1세기전인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에는 육의전상업권(세종로에서 종로3가및 광교일대),객주도가의
진출에 의한 새로운 상업권(종로4.5가,남대문에서 용산에 이르는 일대및
서소문 아현 마포일대),일인상업권(남대문에서 소공동에 이르는
일대),청국인상업권(")등 4개상업권이 형성돼 있었다. 이 가운데 배오개를
중심으로 한 종로4.5가 시전상인으로서는 박승직 최인성 우계옥 김상헌등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가운데서도 주목을 끈 인물은 박승직이었다.
박승직은 포목상으로 대성한 거상이었는데 1896년6월말 그간에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종로4가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개업한다.
이것이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체가 된다. 29년뒤인 1925년에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개편해 처음내건 간판이 옛모습 그대로
두산그룹본사(서울을지로1가 두산빌딩)21층에 보존돼 있다.
이때 청진.나진.경성을 중심으로 한 대로무역에서는 최봉준 김영학 이병균
김기덕 황씨등이 활약했으며 개항장인 원산 인천 목포의 객주상인들도
활발한 무역활동을 펴기 시작한다.
또 1920년대에는 부산의 안희제 경주의 최준 윤현태등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민족자본을 키워나갔다.
박승직은 1907년8월30일 박승직상점을 모체로 한 공익사를 설립,일본
후지방적의 광목을 직접 수입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자본에
의한 무역업의 효시가 된다. 공익사는 한동안 대단히 번창,무역규모를
키워갔으나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무역이 통제되면서 쇠퇴기를 맞아
도산하고 만다.
이때 박승직상점의 히트상품으로 박가분이 등장한다. 박승직의 부인인
정정숙이 1915년 부업삼아 제조 판매하기 시작한것이 박가분이었다. 당시
화장품으로서는 재래의 연지 동백기름 밀기름과 한두장 낱개로 판매하는
장분이 있을뿐이었다.
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박가분은 판매수익이 만만치 않아
20년대초 불경기에 직면한 박승직상점의 운영에 큰 기여를 했다.
한편 박승직은 박승직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1925년),경영진을 새로이
구성하는등 근대적 경영체제를 갖춘다. 이때의 자본금은 6만원으로
1주당가액 50원짜리 주식 1천2백주였다.
박승직상점은 1925년 직원들에 대한 상여금을 최초로 지급하기 시작했으며
선전용 캘린더 5백부를 제작,배포하기도 했다.
이때 박승직은 경성포목상조합(1918)직물상공제회(1919.9)
중앙번영회(1925.12)경성상공협회(1930.12)등을
조직해 일본계상인의 횡포에 대응하면서 업자간의 권익옹호및 협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기업은 협동이다"는 것을 먼저 터득,실천에 옮긴것이다.
박승직상점은 태평양전쟁발발로 국내경제가 악화돼 1945년9월 폐쇄했다가
46년 장남 박두병에 의해 두산상회로 재출범하게 되고 오늘의 두산그룹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무역은 이미 1세기전 박승직상점을 필두로 한 몇몇
민족자본가들에 의해 뿌리를 내렸고 그동안 질적 양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면서 성장해왔다.
<최병요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