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나 씨의 ‘12색 지구과학 색연필 드로잉’.
박미나 씨의 ‘12색 지구과학 색연필 드로잉’.
정상급 작가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세상을 남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재능이고, 다른 하나는 재료를 다루는 능력이다. 특히 재료의 문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내년 1월19일까지 열리는 박미나 개인전은 재료에 대한 탐색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박씨의 작품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규격화된 물감과 캔버스가 화가의 작업을 제약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대와 헌터대 대학원을 나온 박씨가 대학원 졸업을 1년 미루면서까지 색채 연구에만 몰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재료의 특성을 알아야만 제대로 된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시중에 유통되는 다양한 기성 물감과 색연필, 흑연을 수집해 이를 나름대로 분류하고 조합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을 찾아 나간다.

색칠공부 드로잉 연작의 하나로 제작된 ‘12색 드로잉’은 어린이 학습용 색칠공부 책 낱장 위에 모나미와 지구화학에서 나온 12색 색연필 세트로 칠한 것이다. 또 ‘드로잉들’은 해가 그려진 바탕 위에 브랜드와 명도가 다른 연필로 그려 회색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12색’ 연작에서는 연필과 마찬가지로 유화물감에도 기성화된 12색 세트가 존재하며 이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색상을 요구하는 특정인들의 욕구와 이에 영합한 물감회사의 생산 행위가 결합된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이런 색채 탐구는 추상회화인 ‘인물’ 연작으로 이어진다. 0호부터 200호까지 상업적으로 규격화된 22개의 초상화용 캔버스에 그동안 작가 자신과 관계를 맺어온 인물들의 이미지를 회색물감을 사용해 추상적으로 그린 것들이다. (02)735-8449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