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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지 않는 길은 곧 사라진다!

     효창동에 공원이 아닌 묘원이 있다.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까지 바친 애국지사들 유해가 잠든 묘역이다. 1989년 6월 8일 사적 330호로 지정 됐다. 늦었지만 시작일 뿐이다. 현재는 공원과 운동장 그리고 묘역과 기념관이 뒤섞어 있다. 정리가 시급하고 정체성도 필요하다.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남기 의사 등 애국지사가 잠들어 있는 성역이 나무들 틈사이로 빼꼼이 보인다. 찾는 이도 많지 않다. 역사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기억의 공간’이다.   효창원은 230여 년 전 도성 밖 한강이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용이 한강으로 향한다는 용산(龍山)이다.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가장 아끼던 장자를 가슴에 묻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수원 현륭원에 묻었듯이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효창원에 묻었다.   슬픈 역사는 왜 이렇게 반복되는 걸까? 효창원은 슬픔을 담은 묘역이다. 맏아들 문효 세자와 생모인 의빈 성씨가 같은 해 같은 곳에 잠든다. 정조대왕은 도성 밖 가장 가까운 곳에 묘를 쓴다. 수원 화성으로 가는 길목이자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림(松林)이었다. 문효세자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2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 되었지만 홍역으로 5세에 숨진 후 이곳에 잠들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효창원 안 만리창(萬里倉)에 야영과 숙영하며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 불리며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1924년 8만1천460평을 공원 용지로, 순환도로와 공중화장실로 변형해 사용했다. 1944년에 문효세자의 묘를 고양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하며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직단이 사직공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