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 저무는 우시장, 고두현

    저무는 우시장   고두현   판 저무는데   저 송아지는 왜 안 팔아요?   아, 어미하고 같이 사야만 혀.   [태헌의 한역(漢譯)] 薄暮牛市(박모우시)   牛市將欲罷(우시장욕파) 彼犢何不賣(피독하불매) 乃曰彼黃犢(내왈피황독) 應與母牛買(응여모우매)   [주석] * 薄暮(박모) : 저물 무렵, 땅거미가 질 무렵. / 牛市(우시) : 우시장. 將欲罷(장욕파) : 장차 파하려고 하다, 막 끝나려고 하다. 彼犢(피독) : 저 송아지. / 何不賣(하불매) : 어째서 팔지 않는가, 왜 팔지 않는가? 乃曰(내왈) : 이에 말하다. / 彼黃犢(피황독) : 저 누런 송아지, 저 송아지. 應(응) : 응당 ~해야 한다. / 與母牛買(여모우매) : 어미 소와 함께 사다.   [직역] 저무는 우시장   우시장이 막 파하려는데 “저 송아지는 왜 안 팔아요?” 말하기를, “저 송아지는 어미 소와 함께 사야 해.”   [한역 노트] 젊거나 어린 세대들은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牛市場)을 직접 본 적이 거의 없겠지만, 농사를 짓는 집이라면 너나없이 소가 거의 재산 목록 1호였던 시절에는 우시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시장이었다. 시(詩)에서는 이 우시장에 송아지밖에 살 수 없는 농부와 그 아이만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어미 소에 더해 송아지까지 팔아야 하는 농부도 저만치 보인다. 가슴에 사연을 묻어두고 우시장에서 눈길이 마주치기도 했을 두 농부의 마음은, 해질녘에 날리는 저녁노을처럼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결국 둘 다 다음 장이나 다른 장을 기약하며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갔음 직하다. 새 식구, 송아지를 만날 기대감에 한껏 들떠있었을 아이는 이미 어두워진 길을, 아버지 뒤를 따라 고개 숙이고 타

  • 한여름, 고두현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태헌의 한역】 盛夏(성하) 聞說南方霖雨連(문설남방임우련) 仍慣欲打問候電(잉관욕타문후전) 嗚呼今卽親不存(오호금즉친부존) [주석] * 盛夏(성하) : 한여름. 聞說(문설) : 듣자 하니 ~이라 한다, ~라고 듣다. / 南方(남방) : 남쪽, 남녘. / 霖雨連(임우련) : 장맛비[霖雨]가 이어지다, 장마 들다. 仍慣(잉관) :...

  • 쌍계사 벚꽃길, 절대로 혼자 가면 안 돼. 밤에는 더욱…

       쌍계사 십 리 벚꽃 ·2                                         고두현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보이는 길 흩날리는 별빛 아래 꽃잎 가득 쏟아지고 두 줄기 강물 따라 은하가 흐르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빛나는 길 낮 동안 물든 꽃잎 연분홍 하늘색이 달빛에 몸을 열고 구름 사이 설레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둘이 가야 보이는 길 왼쪽 밑동 오른쪽 뿌리 보듬어 마주 잡고 갈 때는 두 ...

  • 추사가 눈 속의 수선화를 시로 읊은 까닭은

         수선화 ( 水仙花 )                               추사 김정희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겨울 제주에 와서 수선화 꽃밭에 들었다. 희고 노란 꽃무리가 구름 같다. 한림공원에는 혹한을 견딘 수선화가 50여만 ...

  • 높은 곳에 오르면 잘못을 빌고 싶어지는 이유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고두현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간다, 하고 빼곡이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용평 숲에서 사흘을 보낸 적이 있다. 나무들의 입김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감미로운 추억이 밀려왔다. 삼림욕장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오솔길은 아늑했다. 낙엽송이 군락을 이룬 능선의 공기는 또 얼마나 싱그러웠던지……. 그곳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뒷집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긴 발왕산에 올랐다. 정상에 도착했더니 전망대 안 식당 벽에 수백 장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말 유쾌하고 감동적인 건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녀석의 ‘고해’였다.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비록 맞춤법은 틀리지만, 내게는 가장 진솔한 마음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것을. 산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진다. 자연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그 개구쟁이의 글귀가 가장 살갑게 다가왔다. 그것은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난 뒤의 청량감처럼, 산에서 얻은 뜻밖의 깨우침이었다. ▶또 다른 시와 인생,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고두현 시에세이집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에

  • 새해 아침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첫 마음                          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

  • 그 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한겨울에 음미해 보는 하이쿠 2수   찬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しぐるや我も古人の夜に似たる)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요사 부손 일본 3대 하이쿠 시인 요사 부손(與謝蕪村·1716~1784)은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 일본 북동부 지방 등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하며 많은 문인에게 하이쿠를 배웠다. 그림 솜씨도 뛰어나 서른다섯 살 무렵에는 직업 화가로 교토에 정착해 거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위대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를 아주 존경해서 모든 면에서 닮고 싶어 했다.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려 애썼다. 마흔다섯 살에 늦장가를 가서 외동딸을 얻었고, 예순여덟 살에 죽어서는 생전의 소원대로 바쇼가 살던 오두막 옆에 묻혔다. ‘찬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라는 하이쿠는 으슬으슬 찬비 내리는 밤, 지금 나처럼 옛사람도 혼자 고독했으리라는 의미로 읽히지만, 이 시의 옛사람이 그가 평생 흠모하던 바쇼라고 한다.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에서는 숯불과 눈을 대비시키며 따뜻함과 차가움의 세계를 겹쳐 보여준다. 불을 품고 있는 재와 화로, 화로를 보듬고 있는 집, 집을 감싸 안고 있는 눈,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 속의 나……. 비교문학자 히라카와 스케히로의 설명이 무릎을 치게 한다. “한 곳에 불씨가 있고, 그것을 덮은 재가 있으며, 그 위를 덮듯이 화로에 붙어 앉은 주인이 있고, 그 작은 방을 에워싼 작은 집이 있다. 그

  • 책으로 나왔어요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연재하는 중에도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책으로 엮어내고 보니 더욱 정감이 가고 애틋하기도 합니다. 책 제목은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입니다. 벌써 예스24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네요. 따뜻한 연말 선물로도 좋을 듯합니다. ㅎㅎ 서문 중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우리 함께 천천히 음미해 봐요. “시를 읽으면 뭐가 좋아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 읽기의 네 가지 유익함'이란 말로 답하곤 한다. 첫째...

  • 홍시 속살 같은 서해 노을- '만리포 사랑'

         만리포 사랑                           고두현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서해대교 위에서 홍시 속살 같은 노을을 만났다. 부드러운 노을이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익어가는 풍경. 늦게 떠난 여행길을 행복하게 색칠해준 첫 번째 화폭이었다. '만리포 사랑' 노래비가 서 있는 해변에...

  •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

  • 그래도 가끔은 전화번호를 눌러 보자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길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짧게 그 상황만 묘사하면 이렇다. 외환위기 때 어머니 먼 길 떠나시고, 이듬해 여름 어느 날. 남부 지방에 큰비 오고 장마 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경남 지역번호 055를 누르고, 다음 번호를 누르려는데...

  • 레몬꽃 피는 그 나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미뇽                           괴테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도금양은 고요히, 월계수는 높이 서 있는 나라?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들이 날 바...

  •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바람난 처녀                     고두현 남해 금산 정상에서 산장으로 내려가다 화들짝 돌아보니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얼레지 한 무더기 칠 년 전 저 길 오늘처럼 즈려밟고 가신 어머니 수줍은 버선코.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바람난 처녀'로도 불린다. 남해 문학기행을 여러 해 다녔다. 10여 년 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낸 뒤 “물미해안이 대체...

  • 바다는 마르면 바닥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 알 수 없네

    이런저런 생각 ( 感遇 )                            두순학 큰 바다 파도는 얕고 사람 한 치 마음은 깊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네. 大海波濤淺, 小人方寸深. 海枯終見底, 人死不知心. 두순학(杜荀鶴·846~907)은 당나라 후기 시인이다. 시인 두목(杜牧)의 막내아들(열다섯째)이라 하여 두십오(杜十五)라고도 불렸다. (두목은 '산행'이라는 시로 유명한...

  • 대동강 물 언제 마르나, 이별 눈물 해마다 보태거니

    임을 보내며 ( 送人 )                                 정지상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꼬,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거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고려 최고 서정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의 절창이다. 시 제목은 《동문선(東文選)》에 '송인(送人)'으로 기록돼 있지만 《대동시선...

  • 조선시대 얼음 서빙고에만 13만여 개 보관

        얼음 캐는 이들을 위한 노래 ( 鑿氷行 )                                                    김창협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만 사람 우르르 강 위로 나왔네. 쩡쩡 도끼 휘두르며 얼음을 찍어내니 울리는 그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층층 얼음 설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그 음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에 저장하고 밤마다 망치 들고 강에 또 모...

  • 윤동주 100번 째 생일날 읽는 생애 마지막 시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

  • 늦게 온 소포를 받고 밤새 잠들지 못한 그날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

  • 이태백도 이 시 앞에선 붓을 던졌다

           황학루 ( 黃鶴樓 )                                    최호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

  •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