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태헌의 한역(漢譯)】 吾獨開(오독개) 勿謂吾獨開(물위오독개) 草田何改變(초전하개변) 汝開吾亦開(...

  •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태...

  • 또 다른 사랑, 곽재구

    또 다른 사랑 곽재구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 피고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무슨 사랑이 필요 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하고 가을이 운다 【태헌의 한역(漢譯)】 別外情人(별외정인) 愈得自由花開綻(유득자유화개탄) 愈得自由人食飯(유득자유인식반) 相與居人盈四垠(상여거인영사은) 何...

  •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

  •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

  • 멀리서 빈다, 나태주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태헌의 한역] 遠處祈求(원처기구) 吾人未知處(오인미지처) 君留如花笑(군...

  • 추석, 유자효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태헌의 漢譯] 秋夕(추석) 忽憶幼年多羞慙(홀억유년다수참) 齒算五十難成眠(치산오십난성면) 雙親駕鶴遠...

  • 코스모스, 김명숙

    코스모스 김명숙 산골 이장 집 막내딸 분홍색 원피스에 높은 하이힐 신고 후리후리한 큰 키에 낭창낭창한 허리 간들대며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마을 길섶에 버스 기다리고 서 있다. [태헌의 한역] 秋英(추영) 山村里長小女兒(산촌리장소녀아) 好著粉紅連衣裙(호착분홍련의군) 足履高鞋益瘦長(족리고혜익수장) 娉娉嫋嫋動腰身(빙빙뇨뇨동요신) 自從淸晨黎明時(자종청신려명시) 路...

  • 사랑, 안도현

    사랑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태헌의 한역】 愛(애) 非是夏炎蟬嘶噪(비시하염선시조) 卽是蟬啼夏如湯(즉시선제하여탕) 蟬知愛是傍熱哭(선지애시방열곡) 不鳴不見故蟬鳴(불명...

  • 섬진강 여울물, 오수록

    섬진강 여울물 오수록 산책 삼아 하늘을 날던 물새들 일제히 날아 내려와 모래톱을 원고지 삼아 발로 새 시를 쓴다 섬진강 여울물은 온종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소리 유장하여 바다에서도 들린다 【태헌의 한역】 蟾津灘水(섬진탄수) 水鳥飛天做散步(수조비천주산보) 一齊落下作新賦(일제락하작신부) 以沙爲紙以足錄(이사위지이족록) 蟾津灘水盡日讀(섬진탄수진일독) 讀聲也悠長(...

  • 무더위, 박인걸

    무더위 박인걸 당신의 뜨거운 포옹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두 팔은 힘이 쭉 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멈출 것만 같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에너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처럼 번져나간다. 잔디밭이라도 어느 그늘진 곳이라도 아무 말 없이 드러누울 테니 그대 맘대로 하시라. 【태헌의 한역】 蒸...

  •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태헌의 한역】 思鷄卵(사계란) 夜起佇坐顧形影(야기저좌고형영) 他人料吾是批判(타인료오시비판) 吾人料吾卽察省(오인료오즉찰성) 他人破卵爲...

  • 한여름, 고두현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태헌의 한역】 盛夏(성하) 聞說南方霖雨連(문설남방임우련) 仍慣欲打問候電(잉관욕타문후전) 嗚呼今卽親不存(오호금즉친부존) [주석] * 盛夏(성하) : 한여름. 聞說(문설) : 듣자 하니 ~이라 한다, ~라고 듣다. / 南方(남방) : 남쪽, 남녘. / 霖雨連(임우련)...

  • 여름 숲, 권옥희

    여름 숲 권옥희 언제나 축축이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태헌의 한역】 夏林(하림) 夏林常漉漉(하림상록록) 便是活子宮(변시활자궁) 今日亦一鳥(금일역일조) 盡情玩而行(진정완이행) 極感搖樹枝(극감요수지) 靑水滴瀝降(청수적력강) [주석] * 夏林(하림) : ...

  • 들꽃, 박두순

    들꽃 박두순 밤하늘이 별들로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들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들린다 꺾는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태헌의 한역】 野花(야화) 夜天因星不入睡(야천인성불입수) 野由野花不空虛(야유야화불공허) 汝氣安穩野寂靜(여기안온야적정...

  • 수선화에게,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

  • 고사, 조지훈

    고사 조지훈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ㅅ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태헌의 한역】 古寺(고사) 敲打木魚不勝眠(고타목어불승면) 姸麗童僧忽入睡(연려동승홀입수) 世尊無語作微笑(세존무어작미소) 輝燿霞下牡丹墜(휘요하하모란추) [주석] 敲打(고타) : 두드리다....

  • 윤사월, 박목월

    윤사월 박목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태헌의 한역】 閏四月(윤사월) 松花粉飛孤峰下(송화분비고봉하) 四月日長黃鳥鳴(사월일장황조명) 山守獨家眼盲女(산수독가안맹녀) 附耳門柱暗暗聽(부이문주암암청) * 四月指閏四月(사월지윤사월) [주석] 松花粉(송화분) : ...

  • 문을 열며...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는 우리의 현대시를, 한시(漢詩)로 옮긴 한역시(漢譯詩)와 곁들여 감상해보는 코너이다. 이 코너를 들여다볼 독자들 가운데는 멀쩡하게 잘 있는 한글시를 왜 굳이 골치 아프게 한시로 옮겼느냐고 질문할 분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편안함과 용이함을 극도로 추구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한글시를 한시로 옮기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