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은 야단이 ‘ 생각이 없다 ’ 였다 . 조금 약한 핀잔은 ‘ 생각이 짧다 ’ 나 ‘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 였다 . 가장 심한 욕은 ‘ 생각 없는 놈 같으니라고 ’ 였다 . 야단칠 때는 언제나 “ 사람은 딱 생각한 만큼만 행동한다 . 생각 좀 하고 살아라 ”...
아버지가 두 동강 난 지팡이를 든 채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 변호사 사무실에 들른다고 외출했던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난 채 귀가해 방문을 굳게 잠갔다 . 이튿날 휴일 새벽에 어머니가 깨워 일어나자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했다 . 차에 탄 아버지가 수주면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 지금은 무릉도원 면으로 바뀌었다 ) 으로 가자고 했다 . 구룡산 쪽으로 길을 들어서라고 할 때에서야 십수 년 전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채석 회...
아버지는 필기구를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양복주머니에서 꺼내면 늦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메모는 생각이 퍼뜩 날 때 바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때로 거꾸로 꽂은 볼펜에서 새 나온 잉크로 옷을 망치기도 해 어머니 잔소리를 들어도 고치지 못했다. 필기구 꽂은 셔츠 주머니가 해져 덧대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필기구도 그렇지만 메모지도 닥치는 대로 썼다. 잠에서 깨면 주머니마다 구겨 넣은 메모지를 꺼내 다급하게 휘갈겨 쓴 난필을 해독하며 잡기장에 옮겨적...
친구가 차에 깔려 죽는 사고가 터졌다 . 초등학교 6 학년 때다 . 학교에 붙여 지은 새집에 이삿짐을 내린 트럭이 운동장에 주차해 있었다 . 점심시간에 같은 반 아이들이 차에 올라가고 매달리며 놀았다 . 그중 한 아이가 운전석에 올라가 시동을 걸자 차가 후진했다 . 내 친구가 차 밑에 떨어진 검정 고무신을 꺼내러 들어갔다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 집에서 점심 먹다 비보를 듣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 사람들이 모여있...
미국에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19 99 년 9 월 부모님이 뉴욕 집에 다니러 오셨다 . 관광을 안 가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차로 모시고 워싱턴 DC. 에 갔다 .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본 뒤 아버지가 제퍼슨 기념관은 안 가겠다고 해 의아했다 . 링컨 기념관을 서둘러 보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했을 땐 문 닫을 시간이었다 . 바리케이드를 치려고 준비하던 병사가 캐딜락 승용차가 다가오자 멈칫했다 . 내가 내려서 &ldq...
산수 문제를 칠판에 풀던 선생님이 분필을 들고 머뭇거릴 때 끝나는 종이 울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선생님이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라며 칠판에 풀다 만 문제를 지우고 수업을 끝냈다. ‘선생님이 풀지 못한 문제’는 저녁때 집에 다니러 온 작은아버지가 바로 풀어줬다. 밤새 문제 풀이를 외웠다. 다음날 선생님이 지난 시간에 이어 한 사람씩 나와 다음 문제를 ...
평생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의 지적이다 .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다 . 윗동네 사는 어른께 아버지가 편지 심부름을 시켰다 .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요즘 말로 손편지가 소통꾼이었다 . 걸음이 불편한 아버지는 내게 편지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 편지를 써서 들려주며 아버지는 “ 답을 받아와야 한다 ” 거나 “ 전해드리기만 하면 된다 ” 는 말씀을 꼭 했다 . 그날은 ...
아버지는 평생 집을 직접 두 번 지었다 . 두 번째 지은 집이 완성되자 바로 이발소를 개업했다 . 1966 년이다 . 우리집에서 백여 미터 앞에 있는 아세아시멘트 공장 준공을 앞두고서다 . 개업하기 전에 ‘ 일성 ( 一盛 ) 이발관 ’ 간판을 먼저 달았다 . 간판을 단 이튿날 어머니가 잠을 깨워 일어나자 아버지는 이미 어둑한 새벽에 양복을 차려입고 기다렸다 .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한 날 . 합격증을 받으러 본관에 함께 들어서던 아버지가 “ 아 !” 하는 비명 같은 탄성을 질렀다 . 나도 놀랐지만 주위에 있던 이들도 모두 놀랐다 . 이어서 아버지는 큰소리로 “ 참 좋은 학교에 합격했다 . 내가 가르치고 싶었던 게 저거다 . 저렇게 현관에 떠억 하니 내건 창학정신을 봐라 . 일류학교답다 ” 라고 했다 . 아버지가 지팡이를 ...
사직서를 아버지께 들켰다 . 신혼 시절 부모님과 한집에 살 때다 . 입사 동기 중 하나가 불러 “ 입행 동기지만 난 대리다 . 다른 대리들이 뭐라 한다 . 존댓말을 써라 ” 라고 했다 . 아래 직급인 계장 중에서는 내가 선임이라 그동안 언행에 각별히 신경 써왔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뜻밖이었다 .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선임부서의 대리 수준이 이 정도냐는 생각에 이르...
숙제는 ‘ 일부터 천까지 ’ 써오는 거였다 . 초등학교 2 학년쯤이었다 . 학생 사이를 돌며 숙제를 검사하던 선생님이 내 숙제를 보자마자 앞으로 나가라고 했다 . 하나 틀린 거에 한 대씩 손바닥을 내밀게 해 회초리로 때리던 선생님이 앞으로 나와 멀뚱거리게 서 있는 내 뺨을 세게 후려쳤다 . 뭐라고 말씀은 했으나 기억나지는 않는다 . 넘어졌다가 일어서자 다른 뺨도 세게 쳤다 . 선생님은 &l...
이제껏 아버지만큼 삼국지 ( 三國志 ) 를 탐독한 이를 보지 못했다 . 아버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 ( 吉川英治 ) 가 쓴 삼국지 번역본을 읽었다 . 가끔 보면 밑줄을 긋기도 하고 여백에 메모를 깨알같이 했다 . 결혼해서 한집에 살 때다 . 출근 인사를 드리자 갑자기 삼국지 일본어판을 구해오라고 했다 . 동경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며칠 걸려 구해드렸다 . 그러고 얼마쯤 지나 나관중 ( ...
같은 반 아이가 학용품을 잃어버렸다고 울었다 . 초등학교 저학년 때다 . 교실에서 잃어버렸으니 같은 반 누군가가 훔쳐간 거라고 다들 단정지었다 . 담임선생님은 “ 모두 눈을 감아라 .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만 들면 용서해주겠다 ” 고 했다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 두 번 세 번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 화난 선생님이 부리나케 교실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만에 양동이 두 개를 들고 들어왔...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아버지가 느닷없이 물었다 . 은행에 다닐 때다 . 점심을 먹고 아버지가 담배 피우는 동안 길에서 지나치는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두어 번 한 말이었다 . “ 별일 없지 ? 언제 밥 한 번 같이 하자구 ” 라는 말을 아버지가 지켜보다 지적했다 . 점심시간에 만나는 직장 동료들인데 딱히 할 얘기는 없어 인사치레로 하는 거라고 강변했다 . 아버지는 바로 “ 정신 나간 놈...
나는 왼발 엄지발톱이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 재떨이를 들고 동생과 장난치다 떨어뜨려 다쳐서다. 대포 탄피 밑동을 잘라 만든 재떨이는 무거웠다. 검붉은 피가 솟구쳐 나오더니 발톱이 빠진 자리에 새 발톱이 나오지 않았다. 인젠 익숙해졌는데도 발톱 없는 왼발을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 상흔(傷痕)이란 게 그렇다. 잊히질 않는다. 양말 벗고 있을 땐 언제나 왼발 위에 오른발을 올려 감추는 건 그때부터 가진 버릇이다. 해수욕장에서는 왼발 ...
아버지 자전거로 타는 법을 배웠다 . 초등학교 4 학년 때다 . 아버지가 나갔다 오면 자전거 바큇살까지 윤이 나게 닦는 게 내 일이었다 . 틈틈이 타봤지만 쉽질 않았다 . 아버지 몰래 자전거 수리도 여러 번 했다 . 한참 만에야 용기 내 타고 나갔다 . 어머니가 놀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 키가 작아 엉덩이를 이리저리 씰룩거려야 페달에 발이 닿았다 . 뒤뚱거리며 시장길을 걷는 것보다 못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
우물에 빠졌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 평생토록 잊히지 않아 지키고 산다 . 초등학교 다닐 때다 . 정확히는 우물 파는 공사장에 떨어졌다 . 외갓집에서 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 한복판에서 소리가 들려 들여다봤다 . 그리고는 깊게 파고들어 간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 깨어나 안방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놀랐다 . 분명히 우물 파는 공사현장을 들여다보려 한 것 같은데 방에 누워있으니 말이다 . ...
물에 빠졌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다들 뛰어들길래 덩달아 물에 들어간 것과 가슴을 세게 압박해 깨어났던 게 전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집에서 2킬로쯤 떨어진 시냇물을 시멘트 공장이 용수를 얻으려고 보로 막아 생긴 큰 물웅덩이였다. 제법 큰 아이들은 거기서 멱을 감는다고 해 따라갔다가 속절없이 물에 빠졌던 거다. 마침 외진 길을 지나던 어른이 바로 물에 두 번이나 뛰어들어 바닥에 가라앉은 나를 발로 더듬어 찾아내 살렸다. 깨어난 걸 확인한 ...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났다 . 대학에 다닐 때다 . 집에 온 나를 본 어머니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 아버지가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셨대 . 비서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알려줬다 . 난 발이 안 떨어져 못 가겠다 ” 라고 했다 .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 곱돌아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오래 지켜봤다 .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으나 아버지 이름으로 입원한 환자는...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구구단의 이름은 중국 관리들이 평민들이 알지 못하게 일부러 어렵게 9 단부터 거꾸로 외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구구단 ( 九九段 · 요즘 학교에서는 ‘ 곱셈 구구 ’ 라 한다 ) 을 어렵게 배웠다 . 초등학교 때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했다 . 그래도 다 외우지는 못했다 . 어둑해질 때 돌아오자 아버지가 주먹구구 셈법을 가르쳐주었다 . &l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