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쁜 발 고두현 우예 그리 똑 같노. 하모, 닮았다 소리 많이 듣제. 바깥 추운데 옛날 생각나나. 여즉 새각시 같네 그랴. 기억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아들 오빠 아저씨 되어 말벗 해드리다가 콧등 뜨거워지는 오후. 링거 줄로 뜨개질을 하겠다고 떼쓰던 어머니, 누우신 뒤 처음으로 편안히 주무시네. 정신 맑던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뻗...
무장공자 ( 無腸公子 ) 윤희구 정원 가득 찬비 내리고 물가엔 가을이 가득 제 땅 얻어 종횡으로 마음껏 다니누나 창자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평생을 두고 애끊는 슬픔 모를 터이니. 滿庭寒雨滿汀秋 得地縱橫任自由 公子無腸眞可羨 平生不識斷腸愁. 조선 말 윤희구(尹喜求·1867~1926)의 시는 해학과 골계미를 겸비했다...
잘 있거라 벗이여 세르게이 예세닌 잘 있거라, 벗이여, 안녕. 사랑스런 그대는 내 가슴에 있네. 우리 이별은 예정된 것이언만 내일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것. 잘 있거라, 벗이여, 인사도, 악수도 필요없느니, 한탄하지 말고 슬픔에 찌푸리지도 말게,―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 세르게이 예세...
황학루 ( 黃鶴樓 ) 최호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
오시안의 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깨우느뇨? 봄바람이여! 그대는 유혹하면서 '나는 천상의 물방울로 적시노라'라고 하누나. 허나 나 또한 여위고 시들 때가 가까웠노라. 내 잎사귀를 휘몰아 떨어뜨릴 비바람도 이제 가까웠느니라. 그 언젠가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나그네가 내일 찾아오리라. 그는 들판에서 내 모습을 찾겠지만 끝내 나를 찾아내지는 못하리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
나의 침실로 –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
오강정에 쓰다 ( 題烏江亭 ) 두목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는 법 수치 견디고 치욕 참는 것이 진정한 남아. 강동의 자제에게는 준재가 많아 권토중래했다면 결과를 알 수 없었거늘. 勝敗兵家不可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俊才多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捲土重來)' 라는 고사성어의 원전이 된 두목(杜牧, 803~852)의 '오강...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에밀리 디킨슨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너무나 살며시 사라져 배신 같지도 않았네- 고요가 증류되어 떨어졌네.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처럼, 아니면,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처럼- 땅거미가 조금 더 일찍 내렸고- 낯선 아침은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내밀었네- 그리하여, 새처럼, 혹은 ...
소군원 ( 昭君怨 ) 동방규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저절로 옷 허리띠 느슨해진 건 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라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소군원(昭君怨)'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의 시다.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온다. 그러나 이 시 덕분에 후세...
아말피의 밤 노래 세라 티즈데일 별들이 빛나는 하늘에게 물었네. 내 사랑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하늘은 내게 침묵으로 대답했네. 위로부터의 침묵으로 어두워진 바다에게 물었네. 저 아래 어부들이 지나다니는 바다에게 바다는 내게 침묵으로 대답했네. 아래로부터의 침묵으로 나는 울음을 줄 수 있고 또한 노래도 줄 수 있는데 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줄 수 있을까.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제위보(濟危寶) 이제현 빨래터 시냇물 위 수양버들 곁에서 백마 탄 도련님과 손잡고 정 나눴네. 처마 끝 춘삼월 비 잇닿아 내린대도 손끝에 남은 향기 차마 어이 씻으랴. 浣紗溪上傍垂楊 執手論心白馬郎 縱有連騫三月雨 指頭何忍洗餘香. 버들가지 휘늘어진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백마 탄 도련님과 손잡고 사랑을 속삭였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달콤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헤아려 보죠. 보이지 않는 존재의 끝과 영원한 은총에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태양 밑에서나 또는 촛불 아래서나, 나날의 가장 행복한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사랑하고 칭찬에서 수줍어하듯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
소네트 89 윌리엄 셰익스피어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으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사랑을 바꾸고 싶어 그대가 구실을 만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아니하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도성 남쪽 장원에서 ( 題都城南莊 ) 최호 지난해 오늘 이 문 앞에서 사람 얼굴 복사꽃 서로 비쳐 붉었는데 어여쁜 그 얼굴은 어디로 가고 복사꽃만 예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去年今日此門中 人面桃花相映紅 人面不知何處去 桃花依舊笑春風 당나라 시인 최호(崔護)의 작품이다. 짧고 간명하면서도 긴 여운을 주는 시. 그 속에 숨겨진 ...
빛나는 별이여 존 키츠 빛나는 별이여, 내가 너처럼 한결같다면 좋으련만- 밤하늘 높은 곳에서 외로운 광채를 발하며, 참을성 많고 잠들지 않는 자연의 은자처럼, 영원히 눈을 감지 않은 채, 출렁이는 바닷물이 종교의식처럼 육지의 해안을 정결하게 씻는 걸 지켜보거나, 혹은 산과 황야에 새롭게 눈이 내려 부드럽게 쌓이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게 아니라-...
아농사 ( 我儂詞 ) 관도승 당신과 나, 너무나 정이 깊어 불같이 뜨거웠지. 한 줌 진흙으로 당신 하나 빚고 나 하나 만드네. 우리 둘 함께 부수어 물에다 섞어서는 다시 당신을 빚고 나를 만드네. 내 속에 당신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네. 살아서는 한 이불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네. 이 시를 쓴 관도승(管道升·1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