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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고두현
The Life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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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시
  • 대동강 물 언제 마르나, 이별 눈물 해마다 보태거니

    임을 보내며 ( 送人 )                                 정지상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꼬,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거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고려 최고 서정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의 절창이다. 시 제목은 《동문선(東文選)》에 '송인(送人)'으로 기록돼 있지만 《대동시선...

    2018-05-25 10:06
  • 산이 가깝고 달이 먼지라 산이 달보다 크다 말하네

            금산을 노래하다 ( 詠金山 )                                               왕양명 한 점 주먹만 한 저 금산 집어 던져 물속에 잠긴 하늘 두들겨 부숴볼까. 묘고대 달빛에 취해 기대섰노라니 어디선가 옥피리 소리 잠든 용 깨워 일으킬 듯. 金山一點大如拳, 打破維揚水底天. 醉倚妙高臺上月, 玉簫吹徹洞龍眠. 명나라 시인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 열 살 때 쓴 시다. 양명...

    2018-05-09 13:49
  • 암·수술을 꽃잎 속에 숨긴 패랭이꽃…카네이션의 조상

          패랭이꽃 ( 石竹花 )                                 정습명 사람들은 모두 붉은 모란을 좋아해 뜰 안 가득 심고 정성껏 가꾸지만 누가 잡풀 무성한 초야에 예쁜 꽃 있는 줄 알기나 할까. 색깔은 달빛 받아 연못에 어리고 향기는 바람 따라 숲 언덕 날리는데 외진 땅 있노라니 찾는 귀인 적어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붙이네. 초야에 묻혀 사는 처지를 패랭이꽃에 비유하며 세속의 모란과 대비시...

    2018-04-25 09:47
  • 천 그루의 울창한 숲도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된다

        우화        랠프 월도 에머슨 산과 다람쥐가 서로 말다툼을 했다. 산이 “꼬마 거드름쟁이”라고 하자 다람쥐가 응수하기를 “자네는 분명히 덩치가 크네. 하지만 만물과 계절이 모두 합쳐져야만 한 해가 되고 또한 세상을 이룬다네. 그리고 나는 내 처지가 다람쥐라는 걸 별로 부끄럽게 생각지 않네. 내가 자네만큼 덩치는 크지 못하지만 자네는 나처럼 작지도 않고 나의 반만큼도 재빠르지 못하지 않은가. 나도 자네가 ...

    2018-04-18 09:55
  •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落花枝にかへると見れば胡蝶かな -아라키다 모리타케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花の陰あかの他人はなかりけり -고바야시 잇사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는 연한 바람 속에서 읽을 때 가장 맛깔스럽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봄날, 몽환적인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잎과 바람에 실려 다시 올라가는 잎, 그것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겹쳐놓은 재주가 신기에 가깝다...

    2018-04-10 08:57
  • 꽃보다도 코에 있었구나 벚꽃 향기는

    그대 그리워져서 등불 켤 무렵 벚꽃이 지네. (人戀し燈ともしころをさくらちる)                         -가야 시라오 두 사람의 운명이여 그 사이에 핀 벚꽃이런가.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ゐ櫻哉)                        -마쓰오 바쇼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夕ざくらけふも昔に成りにけり)                   -고바야시 잇사 일본인에게 제일 사랑받는 꽃이 벚꽃...

    2018-04-04 13:37
  • 연암 박지원은 어떻게 생겼을까- 거구에 쌍꺼풀…

     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 ( 燕巖憶先兄 )                                           박지원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51세 때인 1787년에 형을 추모하며 쓴...

    2018-03-28 12:50
  • 저기 따뜻한 식탁 위에 빛나는 빵과 포도주

                          겨울 저녁                              게오르크 트라클 유리창에 눈발 흩날리고 저녁 종소리 길게 울리는 시간. 따뜻한 집 안에는 많은 사람을 위한 상이 차려져 있다. 어두운 오솔길들을 지나 떠도는 사람이 문 앞으로 다가온다. 대지의 싸늘한 수액으로부터 황금빛으로 솟아오르는 은총의 나무. 나그네는 가만히 들어선다. 고통이 문턱을 돌로 굳혀놓았다. 거기 맑고 밝음 ...

    2018-03-20 16:03
  • 조숙한 천재의 '감각'과 '첫날밤'

            감각                   아르튀르 랭보 야청빛 여름 저녁 들길을 걸으리. 밀잎 향기에 취해 풀을 밟으면 꿈꾸듯 발걸음은 가볍고 머리는 바람결에 신선하리.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한없는 사랑을 가슴에 가득 안고 보헤미안처럼 멀리 멀리 가리. 연인과 함께 가듯 자연 속으로. 조숙한 천재여서 그랬을까. 시인 랭보의 삶은 방랑과 기행의 연속이었다. 시에서도 파격과 생략, 난해한 문체를 마구 휘둘렀다...

    2018-03-14 11:36
  • '닥터 지바고' 소설과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겨울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눈보라가 휘몰아쳤지. 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여름날 날벌레 떼가 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 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 날아들고 있었네. 눈보라는 유리창 위에 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 비친 천장에는 일그러진 그...

    2018-03-05 09:18
  • 씨 뿌리는 이의 장엄한 모습을 오래 바라보네

       씨 뿌리는 계절의 저녁                                  빅토르 위고 지금은 해질녘 나는 문간에 앉아 일터의 마지막을 비추는 순간을 보고 있네.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밤이슬 젖은 땅에 미래의 수확을 한줌 가득 뿌리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네. 그의 크고 검은 그림자가 이 넓은 밭을 가득 채우니 그가 계절의 소중함을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지 알겠네. 농부는 드넓은 들판을 오가며 ...

    2018-02-28 11:27
  • 조선시대 얼음 서빙고에만 13만여 개 보관

        얼음 캐는 이들을 위한 노래 ( 鑿氷行 )                                                    김창협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만 사람 우르르 강 위로 나왔네. 쩡쩡 도끼 휘두르며 얼음을 찍어내니 울리는 그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층층 얼음 설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그 음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에 저장하고 밤마다 망치 들고 강에 또 모...

    2018-02-20 12:39
  • 인생이란 눈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

        자유에게 화답하다 ( 和子由 )                                                 소동파 인생살이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녹는 눈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 같네 그 위에 몇 개의 발자국 남겼다 해도 날아간 뒤 동인지 서인지 어찌 간 곳을 알겠나.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요임금 때에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는데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일이 생겼다....

    2018-02-06 09:24
  • 윤동주 100번 째 생일날 읽는 생애 마지막 시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

    2017-12-29 16:16
  • 늦게 온 소포를 받고 밤새 잠들지 못한 그날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

    2017-12-21 13:27
  • 우리 사랑은 끊기지 않고 늘어나는 금박처럼…

             이별의 말 -슬퍼하지 말기를                                                    존 던 덕 있는 사람들이 온화하게 세상 뜨며, 자신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이고, 그러는 동안 슬퍼하는 친구 몇몇이 이제 운명하나 보다, 혹은 아니라고 말할 때처럼, 그처럼 우리도 자연스럽게, 소란스럽지 않게, 눈물의 홍수도, 한숨의 폭풍도 보이지 맙시다, 속인(俗人)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2017-11-30 13:47
  • 서리 맞은 나뭇잎이 이월 꽃보다 붉구나

                  산행 ( 山行 )                                       두목 멀리 차가운 산 비스듬한 돌길 오르는데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드문드문. 수레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을 보노라니 서리 맞은 나뭇잎이 이월 꽃보다 붉구나. 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風林晩 霜葉紅於二月花. 단풍이 물든 늦가을 산의 정취를 노래한 시인데 《당시선(唐詩選)》에 실려 있다. 백운(白...

    2017-11-21 12:34
  • 송순이 면앙정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면앙정가                             송순 인간 세상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일랑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 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

    2017-11-14 11:39
  • 횔덜린, 26세 가정교사와 안주인의 사랑

            반평생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랗게 익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차가운 물에 성스럽게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고,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얻게 될까? 장벽들은 말없이 차갑게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계 소리만 덜걱거린다.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이 서른세 살 무렵에 쓴 시다....

    2017-11-06 12:45
  • 뛰어난 시는 고심(苦心) 넘어 무심(無心)에서…

            날이 개다 ( 新晴 )                                      이숭인 새로 갠 날씨 좋아 초가 정자에 들르니 살구꽃 새로 영글고 버들가지 푸르네. 시가 이뤄지는 건 무심한 곳에 있는데 애써 먼지 낀 책에서 영감을 구걸했네. 爲愛新晴寄草亭 杏花初結柳條靑 詩成政在無心處 枉向塵編苦乞靈 고려 말 문사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시다. 맑게 갠 봄날 풍광으로 시의 원리를 일깨워준다. ...

    2017-10-31 1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