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고두현
고두현
The Lifeist
이메일
이야기 시
  •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던 풍경이 있었네

    아버지의 빈 밥상                            고두현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행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그날 정독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의 짙푸른 녹음 때문이었을까. 가지 위에 초가집처럼 얹힌 까치둥지 때문이었을까. 문득 어릴 적 밥상 풍경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5~6학년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는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에 살았다. 집도 절도 없어서 오랫동안 절집에 얹혀살다가 계곡 옆에 작은 흙집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당가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키 큰 회화나무와 까치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밥상은 대부분 아버지가 차렸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절집이나 산 아래 마을로 일을 나가는 날

    2019-07-15 15:13
  • 와인을 왜 ‘병 속에 든 시’라고 할까

                  포도주의 혼                         샤를 보들레르 어느 날 저녁,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더라. “사람아, 오 불우한 자여, 유리의 감옥 속에, 진홍의 봉랍 속에 갇혀서, 내 그대 향해 목청 높여 부르노라, 빛과 우정이 넘치는 노래를!   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주려면, 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땀과 찌는 듯한 태양이 있어야 하는가를, 그러나 나는 헛되거나 해롭지 않으리, (중략) 기쁨에 넘친 그대 아내의 두 눈에 나는 불을 붙이리라, 그대 아들에게는 힘과 혈색을 돌려주고 인생의 그 가녀린 선수를 위하여 나는 투사의 근육을 다져주는 기름이 되리라.   내 그대 가슴속으로 떨어져, 신이 드시는 식물성 양식,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진귀한 씨앗이 되리라, 우리들의 사랑에서 시가 움터서 한 송이 귀한 꽃처럼 신을 향해 피어오르도록!”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와인 예찬시다. 이 시에는 포도의 탄생과 와인 제조 과정, 숙성된 와인을 즐기는 이들의 내력이 공감각적으로 묘사돼 있다. 포도밭 일꾼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 흘리며 포도를 수확하는 모습부터 지친 노동 끝에 마시는 와인의 향미까지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저녁 식탁에서 와인 잔을 바라보는 아내의 볼은 벌써 발그레하다. 아들의 얼굴에도 건강한 혈색이 돌고 온몸에 힘이 솟는다. 그런 모습을 보는 아비의 마음 또한 붉게 상기된다. 이렇게 해서 포도는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진귀한 씨앗’이 되고, 시인의 마음속에서 신을 향해 피어나는 꽃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시로 재탄생한다. 와인은 이런

    2019-05-05 18:07
  • 쌍계사 벚꽃길, 절대로 혼자 가면 안 돼. 밤에는 더욱…

       쌍계사 십 리 벚꽃 ·2                                         고두현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보이는 길 흩날리는 별빛 아래 꽃잎 가득 쏟아지고 두 줄기 강물 따라 은하가 흐르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빛나는 길 낮 동안 물든 꽃잎 연분홍 하늘색이 달빛에 몸을 열고 구름 사이 설레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둘이 가야 보이는 길 왼쪽 밑동 오른쪽 뿌리 보듬어 마주 잡고 갈 때는 두 ...

    2019-03-19 11:40
  • 윤동주와 함께하는 봄밤의 시노래 콘서트

           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가 1941년 5월 31일 쓴 시다. 이 시기는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4학년 봄, 기숙사에서 나와 인왕산 아래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할 때다. 일본의 혹독한 식량 정책 때문에 기숙사 급식이 갈수록 나빠지자 그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신촌에서 두 달,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을 보낸 그는 이곳  9번지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 자리를 잡고 그해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외솔회, 136~137쪽) 김송은 함경도 출신의 항일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감옥체험을 다룬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리려다  일본 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저녁을 먹고 김송과 대청마루에서 문학과 세상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와

    2019-02-11 17:47
  • 추사가 눈 속의 수선화를 시로 읊은 까닭은

         수선화 ( 水仙花 )                               추사 김정희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겨울 제주에 와서 수선화 꽃밭에 들었다. 희고 노란 꽃무리가 구름 같다. 한림공원에는 혹한을 견딘 수선화가 50여만 ...

    2019-02-01 16:20
  • 높은 곳에 오르면 잘못을 빌고 싶어지는 이유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고두현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간다, 하고 빼곡이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용평 숲에서 사흘을 보낸 적이 있다. 나무들의 입김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감미로운 추억이 밀려왔다. 삼림욕장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오솔길은 아늑했다. 낙엽송이 군락을 이룬 능선의 공기는 또 얼마나 싱그러웠던지……. 그곳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뒷집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긴 발왕산에 올랐다. 정상에 도착했더니 전망대 안 식당 벽에 수백 장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말 유쾌하고 감동적인 건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녀석의 ‘고해’였다.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비록 맞춤법은 틀리지만, 내게는 가장 진솔한 마음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것을. 산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진다. 자연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그 개구쟁이의 글귀가 가장 살갑게 다가왔다. 그것은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난 뒤의 청량감처럼, 산에서 얻은 뜻밖의 깨우침이었다. ▶또 다른 시와 인생,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고두현 시에세이집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에

    2019-01-21 14:24
  • 새해 아침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첫 마음                          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

    2019-01-11 17:14
  • 그 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한겨울에 음미해 보는 하이쿠 2수   찬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しぐるや我も古人の夜に似たる)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요사 부손 일본 3대 하이쿠 시인 요사 부손(與謝蕪村·1716~1784)은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 일본 북동부 지방 등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하며 많은 문인에게 하이쿠를 배웠다. 그림 솜씨도 뛰어나 서른다섯 살 무렵에는 직업 화가로 교토에 정착해 거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위대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를 아주 존경해서 모든 면에서 닮고 싶어 했다.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려 애썼다. 마흔다섯 살에 늦장가를 가서 외동딸을 얻었고, 예순여덟 살에 죽어서는 생전의 소원대로 바쇼가 살던 오두막 옆에 묻혔다. ‘찬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라는 하이쿠는 으슬으슬 찬비 내리는 밤, 지금 나처럼 옛사람도 혼자 고독했으리라는 의미로 읽히지만, 이 시의 옛사람이 그가 평생 흠모하던 바쇼라고 한다.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에서는 숯불과 눈을 대비시키며 따뜻함과 차가움의 세계를 겹쳐 보여준다. 불을 품고 있는 재와 화로, 화로를 보듬고 있는 집, 집을 감싸 안고 있는 눈,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 속의 나……. 비교문학자 히라카와 스케히로의 설명이 무릎을 치게 한다. “한 곳에 불씨가 있고, 그것을 덮은 재가 있으며, 그 위를 덮듯이 화로에 붙어 앉은 주인이 있고, 그 작은 방을 에워싼 작은 집이 있다. 그

    2018-12-19 16:37
  • 책으로 나왔어요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연재하는 중에도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책으로 엮어내고 보니 더욱 정감이 가고 애틋하기도 합니다. 책 제목은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입니다. 벌써 예스24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네요. 따뜻한 연말 선물로도 좋을 듯합니다. ㅎㅎ 서문 중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우리 함께 천천히 음미해 봐요. “시를 읽으면 뭐가 좋아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 읽기의 네 가지 유익함'이란 말로 답하곤 한다. 첫째...

    2018-11-27 17:24
  • 홍시 속살 같은 서해 노을- '만리포 사랑'

         만리포 사랑                           고두현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서해대교 위에서 홍시 속살 같은 노을을 만났다. 부드러운 노을이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익어가는 풍경. 늦게 떠난 여행길을 행복하게 색칠해준 첫 번째 화폭이었다. '만리포 사랑' 노래비가 서 있는 해변에...

    2018-10-31 11:30
  • 다음 날을 위해 남겨 두었던 한 갈래 길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

    2018-10-19 11:39
  • 금지된 사랑… 내 마음 흩날리는 낙엽 같아라

      가을의 노래       폴 베를렌 가을날 바이올린 가락 긴 흐느낌 하염없이 내 마음 쓰려라. 종소리 가슴 메여 나 창백히, 지난날 그리며 눈물 흘리네. 쇠잔한 내 신세 모진 바람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낙엽 같아라.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1844~1896)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을의 노래(Chanson d'automne)'다. 사랑하는 여인을 갑작스레 잃고 썼다고 한다. 가을날의 쓸쓸한 마...

    2018-09-21 09:15
  •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

    2018-09-05 09:25
  • 하이네, 첫사랑에 울고 마지막 사랑에 또 울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5 월에                   하인리히 하이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내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불타는 나의 마음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 독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시다. 슈만이 노래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다. 읽다 보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년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

    2018-08-20 13:23
  • 그래도 가끔은 전화번호를 눌러 보자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길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짧게 그 상황만 묘사하면 이렇다. 외환위기 때 어머니 먼 길 떠나시고, 이듬해 여름 어느 날. 남부 지방에 큰비 오고 장마 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경남 지역번호 055를 누르고, 다음 번호를 누르려는데...

    2018-08-07 13:09
  • 날마다 많이 웃게나. 지혜로운 사람에게 존경받고…

          진짜 성공이란                  랠프 월도 에머슨 날마다 많이 웃게나. 지혜로운 사람에게 존경받고 해맑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들에게 인정받고 거짓된 친구들의 배반을 견뎌내는 것,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알아보는 것, 튼튼한 아이를 낳거나 한 뼘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 여건을 개선하거나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가...

    2018-07-12 11:16
  • 윤동주 시집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

                 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

    2018-07-04 09:21
  • 레몬꽃 피는 그 나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미뇽                           괴테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도금양은 고요히, 월계수는 높이 서 있는 나라?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들이 날 바...

    2018-06-22 10:03
  •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바람난 처녀                     고두현 남해 금산 정상에서 산장으로 내려가다 화들짝 돌아보니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얼레지 한 무더기 칠 년 전 저 길 오늘처럼 즈려밟고 가신 어머니 수줍은 버선코.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바람난 처녀'로도 불린다. 남해 문학기행을 여러 해 다녔다. 10여 년 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낸 뒤 “물미해안이 대체...

    2018-06-12 09:40
  • 바다는 마르면 바닥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 알 수 없네

    이런저런 생각 ( 感遇 )                            두순학 큰 바다 파도는 얕고 사람 한 치 마음은 깊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네. 大海波濤淺, 小人方寸深. 海枯終見底, 人死不知心. 두순학(杜荀鶴·846~907)은 당나라 후기 시인이다. 시인 두목(杜牧)의 막내아들(열다섯째)이라 하여 두십오(杜十五)라고도 불렸다. (두목은 '산행'이라는 시로 유명한...

    2018-06-05 0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