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무섭다. 가슴 아린 아픔도 세월로 무뎌지고, 가슴 그득한 추억도 세월로 흐려진다. 그러다 어느새 까마득해진다. 뭔가를 잃는 순간은 안타깝지만 그 또한 세월이 흐르면 그게 원래 내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인간은 그렇게 뭔가를 잃어가며, 또 잊어가며 산다.

맹자는 본래 인간의 심성이 선하다고 믿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의예지의 단초다. 인간은 사단(四端)을 품고 있기에 본성이 선하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을 바라보는 맹자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건 믿음이면서 동시에 희망이다. 탐심이 가득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인간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맹자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악이 판을 친다. 현실이 그러하니 성선(性善)을 주창하는 스승에게 보내는 제자들의 눈빛에는 의구심이 그득했다. ‘세상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느냐’는 눈빛이었을 듯싶다. 맹자가 그런 제자들에게 본성이 선한 인간이 사는 세상이 왜 이리 혼탁해졌는지, 그 까닭을 들려줬다. “옛날 우산의 나무(牛山之木)는 원래 아름다웠다. 한데 큰 나라 수도의 교외에 있는 까닭에 도끼로 그 나무들을 찍어댔으니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나고, 우로(雨露)를 받아 싹이 돋기도 하지만 다시 소와 양을 끌어다 자라는 족족 먹이니 저리 빈둥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민둥산을 보고는 원래 거기에는 나무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산지목(牛山之木)은 말 뜻 그대로 ‘우산의 나무’지만 ‘인간 본래의 선함’을 비유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고 우산의 나무처럼 아름다운데 이기심·탐심·권력욕이란 도끼로 연일 본성을 찍어대니 어찌 선함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거다. 맹자는 탄식했다. “사람은 자신이 기르던 가축이 집을 나가면 온 집안이 다 찾아나서지만 정작 양심이 마음을 떠나면 찾아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맹자는 또 “잡으면 남아 있고 버리면 없어진다”고 했다. 인간이 태어날 때 품고 나온 선(善)도 스스로 붙잡지 않으면 결국 없어지고, 언젠가는 선을 품고 나왔다는 사실조차 잊는다는 뜻이다.

속세의 낮에 생긴 사특한 기운을 고요한 밤에 걸러내야 타고난 선이 간직된다. 밤 사이에도 그 기운이 걸러지지 않으면 인간은 하루하루 짐승에 가까워진다. 그러다 어느 날 인간을 ‘원래 짐승’으로, ‘원래 악한 존재’로 규정지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물질을 얻는 대신 ‘인간’을 하나 둘 잃어간다. 손톱만한 이익을 취하려 중한 목숨을 버리고, 사소한 것을 쥐려고 귀한 우정을 버리면서 ‘그게 본래의 인간’이라고 자위한다. 오래 잊혀지면 그게 당초 내것인지도 모른다. 악에 깊이 빠지면 그의 대척에 선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신동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작가/시인
[바람난 고사성어] 우산지목(牛山之木)-인간의 선한 본성은 어디로 갔을까